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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굶주린 에온의 전설 | 조각난 연대기

에온은 가장 불행한 엘프였다. 천 년이나 살았기 때문에.기억술사들은 전한다. 에온이 마침내 패해 흙 위에 누웠을 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고. 그는 말했다고 한다. ‘기쁘다. 참담하게 길었던 이 삶을 마침내 끝내는구나.’에온이 죽었을 때 그를 기릴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나 형제는 물론이고 그의 두 아내도, 그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도 모두 죽은 뒤였다.에온은 엘프 사이에서 뿌리도 가지도 열매도 없는 나무토막과 같았다. 그가 어떻게 자랐고, 누구와 친교를 맺었으며, 누구를 사랑했고, 무엇을 위해 살고 죽었는지 아무도 몰랐다.모든 것을 기억해야 하는 기억술사들을 제외하면.에온의 삶을 이해하려면 엘프의 옛 일을 알 필요가 있다.2천여 년 전, 엘프들은 원대륙에서 벌어진 재앙을 피해 새 대륙으로 건너왔..

누이 여신의 축복 | 조각난 연대기

‘누이 여신의 축복이 누이안을 번성케 하리라.’ 이 글귀는 오래 전 초승달 왕좌의 왕성에 자리한 누이 신전 주춧돌에 새겨져 있었다. 여기 이 말을 굳게 믿었던 한 가문의 이야기가 있다. 소번 가문. 양치기에서 시작했던 소번은 관대한 리들롯 왕의 시절에 남작으로 봉해져 가솔만 수백 명을 거느렸다. 왕과 남작은 좋은 사냥 친구였고 때로 함께 양을 몰기도 했다. 왕은 소번 남작만큼 뛰어난 양치기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늙은 소번 남작은 아들 다섯과 딸 넷을 두었다. 그들 모두가 훌륭한 가문과 혼인했고 태어난 손자 손녀들이 마흔 명을 헤아렸다. 그 중 일곱이 빼어난 기사로 자라 리들롯 왕을 섬겼다. 셋은 여신의 신관이 되었다. 둘은 학자가 되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천여 마리에 이르는 양떼도 있었다. 누가 보아도..

하제의 예언, 레비아탄 | 조각난 연대기

레비아탄은 용족의 행성 ‘미실론’에서 건너왔다. 그도 처음에는 용이었을 것이다. 고향 행성에서 살던 용들은 어마어마하게 몸집이 컸다. 에너지체에서 출발해 각질이 덮인 상태였으므로 무게가 거의 없어 클수록 유리했던 것이다. 모습도 훨씬 다양했다.용들의 조상 ‘미사곤’은 쉽사리 흩어져버리는 에너지 대신 진짜 몸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원문을 열어 용들을 아키에이지 행성 ‘히르노르’로 데리고 왔다. 용들은 허물을 벗을 때마다 새로운 특징을 흡수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이쪽 행성에서 지내는 동안 갑옷처럼 튼튼한 각질 속에 척추동물의 특징마저 일부 갖춘, 오늘날의 용으로 거듭났다. 목적을 이룬 용들은 미실론으로 돌아가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다.그러나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미사곤과 용들이 처음..

붉은 용 '불을 움켜쥔 오스페로스' | 조각난 연대기

미사곤이 사라진 후 알이 부화하지 않음을 알게 된 용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많은 용들이 스스로 어머니가 되기를 선택해 알을 낳았다. 혹시 하나라도 부화하지 않을까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알은 하나도 깨어나지 않았다. 반면 쇠약한 시기에 어머니가 된 용들은 상당수가 죽었고, 나머지는 깊은 잠에 빠졌다. 용족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용들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얼음 가문의 수장인 ‘얼음심장의 페사닉스’가 더 이상 알을 낳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는 잠든 어머니 용들을 지킬 전사들조차 남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남은 용들은 에너지를 아껴 오래 살아남기 위해 허물을 벗어 몸집을 줄였다. 그리고 어머니들이 잠든 거울 왕국의 지하를 지키며 은둔하기 시작했다.살아남은 많은 용들이 죄책감에..

용족의 유래 | 조각난 연대기

용은 아키에이지 행성 ‘히르노르’에서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별, ‘미실론’에서 유래했다.여명기에 탄생한 미실론의 생물들은 에너지체였다. 그들은 몸 모양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고, 날아다녔고, 보통은 반투명하거나 빛의 형태를 취했다. 미실론에서 생명의 죽음은 에너지체를 붙들고 있는 의지가 약해져 흩어져버리는 것인데 그런 일은 아주 쉽게 일어나곤 했다. 다시 말해 미실론의 생물들은 수명이 무척 짧았다. 후손을 남길 힘조차 없었다.어찌 보면 행성의 에너지가 이리저리 흐르다가 어디선가 발생한 의지를 중심으로 맺히면 생물이 탄생하고, 의지가 흩어지면 사라지는 셈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미실론의 대기에 독성이 있어 일반적인 세포조직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르자 에너지체 주변에 각질을 만..

최초의 용 사냥꾼 누온 | 조각난 연대기

누온들은 마침내 미사곤을 사냥할 방법을 생각해냈다.그위오니드 숲에서 가장 큰 거목을 뽑아 수 년 간 다듬었다. 미사곤의 가슴을 꿰뚫을 창이었다. 다시 수천 그루의 나무를 베어 그것을 쏘아 보낼 발리스타를 준비했다. 마침내 준비가 끝나자 누온들은 이 엄청난 창에 ‘용의 죽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용의 죽음을 성벽 위에 올리려 할때, 혼자 미사곤을 사냥하겠다고 떠났던 베살라가 돌아왔다. 베살라는 누온들이 준비한 것을 보더니 이것으로도 미사곤을 사냥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수 년 간 미사곤을 뒤쫓았는데 한 번은 높은 산에 올라가 미사곤이 땅에 가까워졌을 때를 노려 공격했지만, 어떤 무기로도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었다고 했다.다만 베살라는 한 가지를 알아냈다. 미사곤의 불가사의하고 무한한 힘은 그 그림자와 ..

누온과 위대한 용 미사곤 | 조각난 연대기

고대의 대륙들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전설 속의 종족들을 품고 있었다. 날개 달린 전사들이었던 이프나, 이프나의 적이었던 사악한 뱀 나차쉬, 그리고 검은 피부의 누온이 그들이다. 이프나와 나차쉬가 서로를 말살시키기 위해 끝없이 싸우는 동안 누온은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땅에서 그들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매진했다. 누온이 만든 거대한 도시와 성벽은 오늘날 폐허로 변했는데도 여전히 위엄을 품고 있다. 그랬기에 원대륙에서 이주해 온 엘프들이 그 폐허를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택했을 것이다. (체구가 큰 누온이 만든 도시는 엘프들의 몸에 맞지 않았지만 엘프들은 오히려 불편함을 환영했다) 안온한 시대는 길지 않았다.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그림자가 등장하면서 평화와 안식이란 누온들과 거리가 먼 단어가 되어버렸다. 아키에이..

정원의 문지기와 검은 사람 | 조각난 연대기

좁고 둥근 홀이었다. 천장은 높고 기둥은 희었다. 별자리가 새겨진 바닥에는 낙엽이 뒹굴었다.벽을 바른 타일에는 영원이 새겨져 있었다. 작은 별이 자라 큰 별을 짓고, 큰 별이 모여 태양을 이루고, 태양이 늘어서 우주가 되었다. 원 하나가 세상이지만 가장 큰 원도 부분을 닮아 있었다. 그 자체로 완전한 무늬이며 결코 낡지 않는. 홀은 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타나는 현관처럼 생겼다. 문지기 홀이라고 부르면 되리라. 정면에는 문이, 그리고 맞은편에도 문이 있었다. 두 문은 마주본 채 열려 있었다. 그러나 문 너머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한쪽 문 밖에는 황야가 보였다. 먼지구름이 일어나 지평선 너머가 흐렸지만 홀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다. 다른 문 밖은 놀랄 만큼 푸르렀다. 잘 자란 나무와 야생화, 싱싱한 잎이..

이녹 Inoch | 12명의 영웅들

이녹 Inoch만신전의 사제, 한 종족을 멸하고 동시에 창조한 자, 세계 봉인의 수호자. 대륙의 중심에 솟은 산은 옛 말로 하얀 문, 즉 ‘히라마’라고 했다. 그 산 깊은 곳에 왕국 하나가 안겨 있었다.어떤 나라보다 오래되었으나 나가는 자도 들어오는 자도 거의 없어 잊히다시피 한 곳이었다. 그곳의 이름을 히라마칸드, 그곳에 사는 자들을 히라마 인이라 했다. 히라마 인은 체격이 크고 강건했으며 수명은 2백 살이 넘었다. 스스로를 세계가 태어난 자리를 지키는 신성한 족속이라고 여겨서 긍지가 드높았으며 한 명 한 명이 모두 사제이자 전사였다. 대제사장은 왕만큼이나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느브람의 아들 이녹은 여섯 형제자매 가운데 맏이였다. 아버지와 삼촌은 제사장, 할아버지는 은퇴한 대제사장이었다. 아버지의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