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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트라 대 여제' 16화~25화 | 신대륙의 인물들

라이트트윈스 2024. 12. 6. 01:48

 

16화

 

이샤마와 알키미가 처음 흑곰 부족을 출발했을 때 동행한 페레는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부족에서 출발한 전사들이 같은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마주쳐 동행하자 어느새 무리는 백 명이 넘어갔다. 그 무리에서 페레가 아닌 사람은 이샤마와 알키미뿐이었다.

흑곰 부족 페레들이 두 사람을 부족의 손님이라고 소개하자 시비를 걸지는 않았지만, 수상쩍은 눈길로 바라보는 페레들은 많았다. 그들은 각 부족의 뛰어난 전사들이었기에 위풍당당한 데다 또한 사나웠다.

 

시선이 따가워지자 알키미는 페레들과 헤어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흑곰 부족이 말렸다. 아직은 길을 찾기 힘든 곳이니 로카 강이 나올 때까지는 함께 가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초원에서 길을 잃으면 살아남기 어렵기에 알키미는 일단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페레 전사들은 부족별로 번갈아 사냥을 나가 식량을 조달했다. 사냥에 방해가 될 터라 이샤마를 데려갈 수도 없어서 알키미는 주로 야영지에 남곤 했으나 항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라 결국 알키미는 이샤마를 두고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혼자 남은 이샤마가 페레들과 함께 모닥불 가에 앉아 있는데 알키미와 함께 갔던 흑곰 부족 전사 바타미가 급히 달려와 그를 불렀다. 알키미가 사냥 도중 동료를 구하려다가 크게 다쳤는데 임종을 지켜주어야 할지도 모르니 서두르라는 것이었다.

이샤마는 당황한 데다 상대가 흑곰 부족이었기에 의심 없이 바타미의 눈사자에 올랐다. 둘이 탄 눈사자가 초원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모닥불 가에 앉아 있던 또 다른 페레가 일어나더니 조용히 그들의 뒤를 쫓았다.

 

한참 동안 달렸는데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냥을 이렇게 멀리 갔을 리 없었다. 이샤마가 자꾸 이것저것 물어도 바타미는 대답도 잘 하지 않았다. 마침내 먼발치에서 불빛이 나타났다. 그런데 사냥 나간 페레들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횃불이 많았다. 음모를 직감한 이샤마는 갑자기 눈사자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뒹굴었다. 그리고 반대쪽으로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바타미가 급히 눈사자를 돌리더니 뿔피리를 세 번 불었다. 그러자 횃불들 쪽에서 정체 모를 페레들이 일어나 달려오기 시작했다. 숨을 곳 하나 없는 초원에서 두 발로 뛰는 이샤마는 순식간에 따라잡혔다.

 

그때 이샤마가 달려가던 쪽에서 검은 눈사자를 탄 전사가 나타나더니 번개처럼 이샤마를 낚아채어 태웠다. 한 번 멈칫거리지도 않을 정도로 재빠른 솜씨였다.

이샤마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대는 알키미도, 흑곰 부족도 아니었다. 그간 동행하긴 했어도 백여 명에 이르는 다른 종족 전사들의 얼굴을 구별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샤마가 물었다.

 

“누구세요?”

 

“왜? 알면 상이라도 주려고?”

 

상대는 놀랍게도 하리하란 공용어를 또렷하게 말했다. 이샤마는 미심쩍은 기분이 들어 다시 물었다.

 

“알키미 님께서 보냈나요?”

 

“그 친구한테 그런 눈치가 있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그 말씀을 들으니 절 구하러 오신 건 맞군요.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아, 그래? 황도 근처에 성 하나쯤은 요구해도 되는 건가?”

 

“네……. ?”

 

말문이 막힌 이샤마가 어물거리고 있을 때 추적자들이 가까워졌다. 낯선 전사는 몸을 돌려 활을 쐈는데 백발백중이었다. 그러나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적들도 활을 쐈지만 이쪽은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이샤마가 뒤를 흘끔거리다가 다시 앞을 보니 새로운 페레들이 보였다. 익숙한 흑곰 부족이었다. 이샤마를 태운 전사를 발견한 알키미가 맹렬히 달려오며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친절한 얼간이라고나 할까?”

 

뒤이어 추적자들이 밀려왔다. 이샤마가 안전한 것을 본 알키미는 일단 추적자들을 물리치는 데 집중했다. 엄폐물 하나 없는 정면대결인 데다 비록 적의 숫자가 더 많았지만 분노한 알키미는 다가오는 적들을 짚 인형처럼 쓸어버렸다. 흑곰 부족도 목숨을 걸고 도왔다.

기세에 당황한 적들이 멈칫거리자 낯선 전사가 먼저 물러나며 뿔피리를 꺼내 불었다. 뿔피리의 사용법은 부족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퇴각 신호 정도는 다들 알아들었다. 모두 도망치기 시작하자 낯선 전사가 이죽거렸다.

 

“이따위 허허벌판에서 싸워서야 셈이 뻔하지. 한 명 남을 때까지 싸워서 이기면 뭘 해?”

 

일행이 페레들의 본대와 가까워지자 적들은 추적을 포기했다. 그제야 서로 대화할 겨를이 생겼다. 바타미가 배신했다는 것을 안 흑곰 부족은 크게 놀랐다. 이샤마가 누구이기에 바타미가 그런 행동을 했는가? 알키미가 선뜻 밝히지 못하자 낯선 전사가 끼어들었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알 텐데. 내가 왜 여기 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배신자도 그놈 하나가 아닐걸. 그간 지켜보니까 언제 기회가 오나 하고 침 흘리는 놈들이 적어도 대여섯은 되던데. 페레 회합에 따라가면서 그런 비밀이 지켜질 줄 알았어? 아니, 페레 회합이 왜 열리는지는 알아? 오스테라 놈들이 황금으로 국을 끓여놓고 페레들을 부르고 있으니 그거 한 국자 더 먹고 싶은 놈들이 이미 온갖 정보를 다 갖다 바쳤지. 유목민이라고 의리 있는 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배신자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달콤한 것을 오래 갖고 있으면 아무래도 파리가 꼬이는 거 아니겠나. 이제 헤어질 시각이야.”

 

알키미는 그의 말을 듣고 자신이 페레를 너무 믿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물론 흑곰 부족은 알키미에게 그간 신의를 다했다. 오늘의 싸움 때문에 흑곰 부족의 전사 셋이 죽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타미의 배신을 사과하며 그자는 다시는 부족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낯선 전사의 말이 아니라 해도 알키미 또한 이렇게 된 이상 페레들과 헤어져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어차피 배신자들이 이샤마의 정체를 안다면 그들을 위해 피를 흘려준 자들에게 끝까지 정체를 숨기는 것도 도리가 아니었다. 알키미가 이샤마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이샤마가 말했다.

 

“나는 파비트라 여제 폐하의 아들, 이샤마 황태자입니다. 그동안 호의와 도움을 베풀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흑곰 부족은 언제까지나 나의 친구로 존중을 받을 것입니다.”

 

흑곰 부족은 크게 놀랐지만, 황도로 돌아간 후 사례를 하겠다는 이샤마의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부족의 손님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페레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며, 오히려 바타미의 배신 때문에 저들이 빚을 졌다는 것이었다. 이샤마는 마지막까지도 페레들은 그에게 고귀함을 보여주었다며 웃었다.

심지어 흑곰 부족은 그들 일행이 안전한 곳까지 가도록 돕겠다고 했다. 페레 회합에는 그 후에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동행해서 초원의 띠까지 가기로 했다.

 

알키미가 낯선 전사의 이름을 물었지만 그자는 자신의 이름 따윈 중요하지 않다며 밝히기를 꺼렸다. 그래도 뭐라도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며 계속 캐묻자 연모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 이름은 어느 모로 보나 페레답지 않았기에 알키미는 계속 되씹어 보다가 문득 그게 의 친구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했다. 남방 아므르타 출신인 알키미는 베로에 쪽에서 쓰는 동방어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베로에의 연이라면, 다름 아닌 류이진의 가문이 아닌가?

 

비파 항구에 있는 류이진이 이곳까지 도움의 손길을 보낸 거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오스테라가 페레들에게 손을 뻗치는 것을 알았다면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류이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연모가 왜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는지도 짐작이 갔다. 베로에 출신의 페레라면 유목민들이 가장 경멸하는 길들여진 페레, 즉 테미캣일 것이다. 테미캣이 초원의 페레들 앞에서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무렵, 오스테라에서는 아르카디오가 알려준 계략을 받아들여 새로운 계획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은밀히 꾸려진 사신단은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전 황제 베난을 찾아갔다.

베난은 오스테라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들이 하려는 말을 다 알았다는 것처럼 비웃었다. 자신은 페리사 황제를 죽인 대역 죄인이므로 황위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걸 잊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오스테라 사신이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하리하랄라야의 황위 얘기겠지요. 그건 파비트라 여제에게 주어버리시고, 새 제국을 하나 더 세우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17화

 

파비트라에게 두 가지 소식이 도착했다. 하나는 좋은 소식, 하나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좋은 소식은 황태자 이샤마의 귀환이었다. 알키미와 함께 황도 근교에 도착했다는 전언을 들은 파비트라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아들을 보러 달려 나가고 싶었으나 황제의 처신으로는 걸맞지 않았기에 나디르를 보내는 것으로 겨우 타협했다.

나쁜 소식은 베난의 실종이었다. 실종이라고 보고된 이유는 탈출인지 납치인지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유배지를 급습해 베난을 데려간 군대는 오스테라 측으로 보인다고 했다.

 

사실 그걸 나쁜 소식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 파비트라는 그들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베난은 하리하랄라야의 황위에 다시 오를 수 없는 자였다. 또한 공식적으로 파비트라의 남편이었지만 인질의 가치조차 없었다. 파비트라도, 이샤마도 그에 대해 아무 애착이 없었다.

그나마 과거에는 그의 존재가 파비트라의 재혼을 막아주는 구실이었지만 이제 직접 다시 제국을 탈환한 파비트라에게 감히 혼인을 강권할 신하 따윈 없었다. 그리고 이스밀도 이미 곁에 없었다.

 

이튿날, 이샤마와 알키미는 드디어 황도에 도착해 파비트라와 재회했다. 황궁을 떠나 떠돌며 몰라보게 자란 아들을 본 파비트라는 목이 메었다. 놀랍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그만큼 슬프기도 했다. 금세 돌아올 줄 알고 떠났던 길이 이렇게 꼬여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사이 이스밀은 떠나갔고, 아들의 얼굴은 부쩍 이스밀을 닮아가고 있었다.

 

이샤마도 어머니의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꼈다.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아가씨 같던 어머니의 눈가며 입가에 어느새 주름이 자리 잡았다. 어머니가 그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자 그도 같이 눈물을 글썽였지만 솔직히 그는 기분이 어색했다. 어머니는 어느 모로 보나 손색없는 여제의 풍모였지만 자신은 황태자라는 자각이 그리 들지 않아서였다.

 

알키미는 파비트라가 믿었듯 과연 황태자를 지켜냈다. 파비트라는 알키미에게 높은 관직을 제안했지만 그가 오히려 거절했다. 그는 자신에게는 정무보다 황제와 황태자를 가까이에서 지키는 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작위만 받아들인 채 여전히 두 사람의 호위 총관으로 머물게 되었다.

알키미가 받은 작위 이슈바라’,  군주는 본래 하리하랄라야가 중앙집권적 제국이 되기 전, 새로 정복한 땅의 왕에게 내리던 칭호였다. 그리하여 알키미는 비록 명예 작위일지언정 남방 출신으로서는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샤마는 다시 황태자로 돌아왔다. 파비트라는 본래 오스테라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한동안 아들과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그것조차 미루게 했다. 여제는 이샤마의 기분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고, 함께 하는 자리를 자주 만들려 했다. 하지만 마무리되지 못한 국정 문제가 머리에 꽉 차 있었기에 이샤마와 마주 앉아 정담을 나누다 보면 이야기는 곧 제국을 다스리는 문제 쪽으로 흐르곤 했다.

파비트라는 너무나 힘들게 황제가 되었고 그걸 빼앗겼다가 다시 되찾기까지 했기에 늘 마음이 불안했다. 그래서 나이만 먹었다 뿐이지 제왕학을 배운 적도 없던 아들에게 자꾸 어려운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이샤마가 대답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답을 할 때면 파비트라는 점차 초조해졌다.

 

이샤마가 점차 어머니와 마주하기를 불편해할 무렵, 예상대로 페레 부족 연합체가 국경을 침범해오면서 이샤마는 자연스럽게 파비트라의 관심에서 놓여났다. 이미 류이진이 보낸 테미캣 아윤을 통해 페레들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던 여제는 군대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류이진의 정보에 따르면 페레들은 오스테라의 돈을 받고 움직이는 것이므로 전세가 불리해지면 오래 버티지 않고 달아날 것이었다. 이 기회에 직접 본때를 보여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황도를 비우기에는 아직 불안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황태자가 돌아와 있지 않은가? 이스밀에 대한 충성심이 여전한 나디르라면 이샤마를 충심으로 보좌해 줄 것이다.

파비트라는 황태자 이샤마를 섭정으로 임명하고 나디르와 알키미에게 보좌를 당부한 뒤 직접 원정에 올랐다. 막 떠나려 할 때 알키미가 나와 아뢰었다.

 

“초원의 페레는 그림자 같습니다. 폐하, 그림자를 뒤쫓지 마십시오. 그들은 제멋대로 달리는 것 같지만 늘 같은 길로 되돌아옵니다. 초원은 생각보다 좁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떠날 때 각오한 대로 페레들과의 싸움은 속도전이었다. 초반에 정면으로 싸워 패퇴시키고 나자 페레들은 부족별로 흩어져 초원을 누비며 교란 작전을 폈다. 그들에게 이끌려 매사냥 고원 깊은 곳까지 들어간 파비트라는 어느새 페레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유가 뭘까? 모두 달아나서?

아니었다. 얼마간 더 나아가던 파비트라는 떼죽음당한 짐승들의 시체를 보았다. 그제야 알키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초원은 생각보다 좁다. 그 말은 초원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바로 군대를 돌렸지만 한 번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나자 초원은 마치 올가미로 변한 듯했다. 몇날며칠을 달렸지만 샘 하나 찾아내지 못했다. 물과 식량이 떨어져 가자 모든 병사들의 신경이 극도로 곤두섰다.

그러던 중 척후병이 페레 군대가 동쪽으로 간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교전이 벌어진다면 백전백패였다. 모두 반대쪽으로 가야 한다고 모두 생각했지만 파비트라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간 쪽으로 따라가라.”

 

파비트라는 군대를 여럿으로 나누어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일자진을 폈다. 그런 상태로 동쪽을 향해 전진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하면 바로 연기를 피워 알리도록 했다. 이틀 가량 갔을 때 남쪽 끄트머리 군대에서 연기가 솟아났다. 파비트라는 채찍을 후려치듯 일자진을 휘어 동쪽을 덮치도록 했다.

과연 페레 군대는 동쪽에서 왔고, 숫자가 적었기에 후방이 짧았다. 그들의 후방을 잡아채는 데 성공하자 포위된 페레들은 처음으로 도망치지 못한 채 패했다.

 

사로잡힌 페레들은 쉽사리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다. 파비트라는 페레들은 여전히 황제의 신민이며 단지 오스테라에게 매수된 자를 벌하려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설명했다. 통역을 통해야 해서 그런지 파비트라의 진심은 쉽게 전해지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비트라는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을 고문하지도 않았다.

하루가 지난 후, 한 전사가 처음으로 파비트라에게 입을 열었다.

 

“황태자와 검은 전사는 황제의 품으로 안전히 돌아갔소?

 

파비트라는 깜짝 놀라 그에게 여러 가지를 캐물었다. 그제야 상대가 흑곰 부족의 전사임을 알게 된 파비트라는 즉시 그를 풀어준 후 다른 포로들 중에서도 흑곰 부족은 모조리 풀어주게 했다. 그리고 예를 갖추며 내 아들을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았다고 했다.

상대는 황제가 이럴 줄은 몰랐던 듯 당황했지만 곧 말했다.

 

“황태자는 어머니를 닮고 검은 전사는 주인을 닮았음을 알겠소.”

 

자유의 몸이 된 흑곰 부족은 동족들을 버리고 저들끼리 떠나는 대신 남은 포로들과 한나절 동안 대화했다. 마침내 합의에 도달한 그들은 파비트라를 한 호숫가로 안내했다. 대 회합이 열렸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자 지난 대 회합에서 대 마라로 뽑힌 바람길 부족의 자로갈 마라가 나타났다.

흑곰 부족의 중재로 자로갈 마라와 대화를 하게 된 파비트라는 오스테라와 손을 끊는다면 페레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물론 페레들은 그 전에도 이미 자치를 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황제가 직접 인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로갈 마라는 한참 생각하더니 동족들의 의견을 모아보겠다고 약속했다.

 

파비트라는 조금 당황했지만 곧 그는 대 마라일 뿐 황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부하들 일부는 그런 약속을 믿고 물러나야 하느냐고 의문을 품었지만 파비트라는 상대가 얼마든지 거짓말을 해도 되는 상황에서 신중하게 답했음을 믿고 군대를 돌이켜 황도로 돌아갔다.

자로갈 마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때, 또다시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남방에서 갑자기 독립을 선언하며 용의 후예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남방 지역은 용이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이라는 검은 사막을 비롯하여 혹독하게 더운 기후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인구는 적었고, 그나마도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사막을 오가는 대상들이어서 사실상 남방의 주민이라 할 수 없었다. 남방의 중심 도시인 아므르타도 서방 쪽으로 가면 중간 규모의 도시와 비슷한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제국의 지배도 상대적으로 느슨한 편이었다. 과거 이스밀이 군대를 키울 때 아므르타를 택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만으로도 어처구니없는데 심지어 황제를 참칭한 자는 사라졌던 베난이었다. 오스테라가 배후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지난번에 베난을 탈옥시켜 간 후로 조용히 있는가 싶더니 이런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반란 세력의 규모는 알 수 없었다. 남방이니만큼 그리 대규모는 아니리라 짐작했지만, 진압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나마 살 만한 도시인 아므르타는 남방 중에서 최북단 도시였고, 그보다 남쪽으로 군대를 보내는 것은 보통 담력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흙이 물처럼 끓어오르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황도의 턱 아래 반란 세력을 두고 멀리 원정을 가는 것도 곤란한 일이었다. 경계로만 따지자면 남방은 황도와 꽤 가까운 편이었다.

 

생각할수록 난제였다. 진압하긴 어렵고, 진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때 황제였다가 대역죄인이 된 베난을 묵인해서야 제국의 권위가 서지 않거니와 혹 베난이 새로이 결혼해 자식이라도 얻는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질 터였다.

파비트라는 오스테라 인들의 의도가 황제의 오스테라 원정을 막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알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화가 치밀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오스테라에 꽤 머리 좋은 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가서 진압하기는 어렵되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화친을 맺을 수도 없는 상대. 그런 상대를 황제에게 들이댄 것이다.

 

 

18화

 

악조건을 감수하며 남방 원정을 강행해야 할까, 좀 더 기다려봐야 할까? 파비트라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나쁜 소식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베난이 죽은 다할의 자식을 찾아내어 양자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짓을 하는 의도는 뻔했다. 지금은 새로운 제국을 세운 양 떠들고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하리하랄라야의 황위라는 뜻이었다. 그런 식으로 제국이 분열에 휘말리면 제국의 서쪽 끝인 오스테라로의 원정은 요원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대부분의 대신들은 원정을 말렸다. 당장 제국으로 쳐들어올 여력도 없는 자들을 정벌하려고 출진하기에는 이득보다 손해가 크니 저쪽에서 제풀에 무너지거나 무슨 행동을 취할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답답함 때문에 파비트라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해쓱해져가자 우려의 목소리가 퍼져갔다. 마침내 알키미가 파비트라 앞에 나서서 아뢰었다.

 

“폐하. 신은 비록 실제로 다스린 적은 없으나 남방의 이슈바라이옵니다. 제게 군대를 내리시어 반역자의 무리를 치게 하십시오. 폐하께서는 옥체를 보존하시어 향후 오스테라를 정벌하심이 옳으리라 사료되옵니다.”

 

알키미는 그의 말대로 남방의 유일한 이슈바라(군주)였으며 아므르타 출신이기도 했으니 책임감을 느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도 있었다. 알키미의 뛰어난 무예나 황태자를 살려 돌아온 능력, 그리고 충직함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었으나 그는 대군을 거느리고 전쟁을 치러 본 경험이 없었다.

그런 임무에는 오랫동안 연의군을 지휘해 온 데다 매번 승리를 거둬 온 나디르가 적임이었다. 파비트라는 나디르를 함께 보내고 싶어했지만, 나디르는 남방 원정이 성공하기 어렵다며 오히려 출군을 반대했다.

 

나디르는 과거 이스밀과 함께 아므르타에서 군대를 키워 본 경험이 있었다. 서방 출신인 그에게는 남방의 북쪽 끝에 위치한 아므르타조차도 겨우 견뎌낼 만한 날씨였다. 새로 생겼다는 베난의 제국은 그보다 남쪽이라는데 그런 황무지며 사막에 사람이 살 만한 땅이 있겠는가? 아니, 사람인들 있겠는가? 이름만 제국일 뿐 사실상 원주민 부락 몇 개로 이뤄져 나라라고도 하기 힘든 곳일 게 뻔하다는 것이 나디르의 생각이었다.

또한 원정군이 간들 지옥 같이 덥고 질척거리는 땅에서 제대로 된 전투인들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디르의 생각이 그러하자 상비군의 주력을 이루는 연의군 출신 지휘관 및 병사들의 생각도 나디르 쪽으로 기울어졌다. 남방 원정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할 분위기였다.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 황제의 뜻임이 알려지자 그 다음부터는 아므르타에 미리 군을 주둔시키고 기다리는 편이 나은가, 상대가 군사를 일으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은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전자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상대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동안 군대 유지비용이 들 테고, 후자는 선수를 빼앗길 가능성이 컸다. 사실상 둘 다 좋은 계책이 아니었다.

가장 나은 수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상대국으로 먼저 쳐들어가는 것이었지만 패전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신하들은 모두 그 주장만은 하지 않으려 했다.

 

신하들이 토론으로 세월을 보내며 눈치를 보는 동안 알키미가 다시 한 번 나서서 자신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마침내 파비트라는 눈을 꾹 감고 그의 주청을 윤허했다. 그에게 3만의 군대를 주고 참모로 류이진의 둘째 아들 나밀을 데려가게 했다.

나밀은 영리하기로 이름난 젊은이였지만 전쟁은 물론 정무 경험조차 없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거리를 떠도는 한량에 가까웠다. 그런 것조차 아버지 류이진이 젊었을 때와 똑같았다.

비록 말석 참모였지만 나밀은 여제의 명을 받들면서 한 가지만 허락해 달라고 했다. 막냇동생 제니리를 데려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제니리는 고작 열다섯 살 먹은 소녀였기에 파비트라는 몹시 의아했다. 하지만 나밀은 웃으면서 제니리가 있어야 내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답했다. 결국 제니리는 병사들까지 통틀어 전 군 최연소로 남방 원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신분도 애매해서 참모 보좌관이라는 괴이한 직책을 만들어야 했다.

원정군이 출군하는 날, 군복을 줄여 입고 나타난 제니리는 작은 체구에 발랄한 것이 영락없는 그 또래 소녀였다. 삼촌뻘, 아버지뻘 군인들로 둘러싸여서도 주눅 들거나 겁먹지 않는 면이 그나마 칭찬할 점이긴 했지만 파비트라는 못내 불안한 심정이었다. 공을 세우기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제니리의 존재가 군대의 기강을 해치지는 않을까?

 

알키미가 이끄는 남방 원정군 가운데 핵심은 연의군 출신이었다. 연의군은 그간 승전을 거듭해 온 터라 콧대가 높았고, 이번 원정을 놓고 나디르와 날카롭게 대립해 온 알키미에 대한 충성심도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 점은 행군을 시작한 지 닷새도 되지 않아 뚜렷이 드러났다.

알키미는 본인이 충직한 성품이라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다. 자신이 모범을 보이면 다들 따르리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런 점 때문에 파비트라가 유연한 나밀을 곁에 붙인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밀은 군대 내 여론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군대를 편성할 때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자들을 구석구석 배치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일찍이 류이진이 그랬듯 연 가문 출신들이 기본적으로 익히는 재주였다.

아므르타까지 사흘 정도 남은 날 저녁, 나밀이 막사에 마주 앉아 낙서를 하고 있는 제니리에게 말했다.

 

“한 번쯤 놀래줄 때가 됐지?”

 

“오빠가 준비는 잘 했을 것 같은데, 여기서는 말고.”

 

“아므르타가 낫다 그거야? 효과는 크겠지만 일도 커질 텐데.”

 

제니리가 양 뺨을 동그랗게 하며 웃었다. 갈래머리를 묶은 소녀여도 입에서 나오는 건 연 가문 출신의 성격 그대로였다.

 

“콧대 높은 자들은 자기들의 무능을 절감해 봐야 정신 차리잖아.”

 

사흘 뒤, 아므르타 근처에 다다른 원정군은 먼저 간 척후가 아므르타가 폐쇄됐다는 소식을 전해오자 크게 놀랐다. 벌써 베난의 군대가 움직였단 말인가?

그런데 아므르타에서는 아무 깃발도 오르지 않았고 단지 폐쇄만 된 터라 내부의 상황이 어떤지 알 길이 없었다. 편지를 묶은 화살을 날려도 아무 답이 없었다. 아므르타를 지키고 있던 군대는 보잘것없었으므로 베난의 군대에게 이미 점령당했으리라는 예상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다만 대군이 아므르타를 점령했다면 이렇게 조용한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동시에 베난 군이 오지 않았다면 답이 없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때 나밀이 알키미에게 나아가 이렇게 된 이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니 연의군 소수 정예만으로 아므르타 북쪽 성문 앞을 경계하게 하고 본진은 남쪽을 막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베난의 선발대가 아므르타를 차지했거나, 적어도 진군 중이어서 아므르타가 폐쇄된 것이라면 남쪽에서 적군이 다가오리라는 예상은 옳았다. 또한 아므르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뿐이라면 당장 교전을 벌여서는 곤란했다.

 

알키미가 나밀의 조언대로 군대를 배치하자 본대에서 떨어져 저들끼리 있게 된 연의군은 공을 세워 능력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충만해졌다. 그래서 포위한 채 경계만 하라던 명령을 어기고 아므르타 성문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아므르타에서는 당연히 농성전으로 응수했다.

양측은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다. 그 과정에서 아므르타가 베난 군에게 점령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아므르타 사람들은 화가 나서 상대가 황제가 보낸 원정군임을 알고도 문을 열지 않았다.

 

교전 사실이 알키미에게 알려진 것은 이튿날이 되어서였다. 알키미의 본대는 남쪽으로 상당히 내려가 진을 쳤기 때문이었다.

알키미는 크게 화가 났다. 아므르타는 그의 고향이었다. 그런 곳에서 명령을 어기고 교전을 벌여 사람들을 죽인 데다 덕택에 악감정마저 샀다. 알키미가 다시 아므르타로 돌아와 위험을 무릅쓰고 고향 사람들에게 이번 교전은 사고였을 뿐이니 이런 일로 황제에게 반역하지 말고 문을 열라고 호소하고서야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그나마 지휘관이 알키미였기에 쉽게 해결된 셈이었다. 죄를 지은 연의군은 그 광경을 불편한 심경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아므르타로 들어간 뒤 알아보니 아므르타 사람들은 베난의 군대가 용의 수호를 받아 저주를 내린다는 소문이 돌아 그걸 막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모든 성문을 폐쇄했던 것이었다.

아므르타가 교전으로 입은 피해를 보상하기로 약속하고 피해자들을 위한 제례를 치른 뒤 알키미는 알키미는 연의군을 크게 벌할 생각이었다. 그때 다시 나밀이 나서서 이번 일은 착오일 뿐이니 연의군의 오만함을 질책하고 반성하게 하는 선에서 그치는 편이 전군의 사기를 위해 나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연의군은 알키미의 관대한 처분을 받자 스스로를 더욱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연의군이 본래 정예군이기에 가능한 반응이기도 했다.

 

그 결과 원정군 내의 불화 요소는 사라졌다. 알키미의 권위는 오르고 연의군은 총대장을 충실히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연 가문 남매가 꾸민 계략이었다.

그걸 위해 아므르타 사람들과 연의군 일부가 희생되었다. 나밀과 제니리도 이렇게 될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가만히 둬도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이 불화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가올 베난 군과의 싸움에서 패하는 것은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이다.

 

어린 나이에도 그런 계산을 냉혹하게 해내는 것은 류이진의 아이들다운 자질이었지만 동시에 알키미 같은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는 절대로 이해 못할 부분이었다. 남매도 그걸 알았기에 이런 큰일을 벌이면서 알키미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그렇듯 어찌 보면 대담하고, 어찌 보면 전쟁조차 장기 놀이처럼 생각하는 남매의 손에서 남방 원정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19화

 

남방 원정군이 아므르타에 입성했을 무렵, 탑의 도시를 지키는 메레디스가 보낸 사자가 황도에 당도했다. 사자가 파비트라에게 바친 편지에는 두 가지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첫째는 그간 오스테라가 베난의 괴뢰국 ‘용의 후예’를 지원한 내역의 조사, 둘째는 최근 페레 부족들 사이에 벌어지는 권력 교체를 조사한 내용이었다.

 

메레디스는 오스테라와 맞닿은 최 변경의 땅을 지키며 크고 작은 충돌을 자주 겪어왔기에 누구보다도 오스테라를 잘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보고서는 상세할뿐더러 방대했다. 평소 느린 듯하지만 신중하고 꾸준한 메레디스의 성품 그대로였다. 메레디스는 과거 이스밀이 파비트라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한 일들을 꿰뚫어보는 명민함을 지녔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수 년 동안 오스테라를 관찰한 결과는 틀림없이 믿을 만할 텐데, 내용은 당혹스럽게 이를 데 없었다.

 

베난의 괴뢰국은 사막이 대부분이긴 해도 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용의 길을 이루는 수십 군데의 오아시스 마을을 이미 병합했다. 오스테라의 지원을 통해 무장도 충분히 갖추었고, 동원 가능 군대는 적어도 2, 3만여 명에 달했다.

남방 원정군을 이끄는 알키미에게 3만의 군대를 주었는데, 그건 적군의 서너 배는 충분히 넘겠지 싶어 결정한 규모였다. 혹독한 날씨를 견디며 익숙하지 않은 황무지를 행군해서 정체 모를 적의 근거지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가 엇비슷한 규모라니 이만저만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최근 베난의 행보는 꽤 영리해서 체계적으로 원주민의 환심을 살 계획을 실천하고 있는 데다 남방 특유의 용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고취시키고 있다고 했다.

뒤늦게 제국에 합류한 남방 지역은 본래 오랫동안 용을 숭배해 왔다. 남방인들은 용이 검은 사막을 헤엄쳐 건너 머나먼 남쪽에 있다는 지옥의 문까지 가고, 이윽고 지옥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남방 이슈바라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용이 지옥 바닥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동안 지옥에 빠진 자가 용의 비늘 한 개라도 가질 수 있으면 다시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여겨졌다. 또한 사막 어딘가에는 용의 뼈가 있는데 그것을 손에 넣으면 무한한 생명을 얻거나 모든 병을 고칠 수 있어서 누구나 갖고 싶어 하지만, 아직까지 용의 뼈를 얻어 사막을 빠져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이렇듯 전설이 아직도 위력을 발휘하는 땅에서 용에 대한 신앙을 새로운 나라에 덧입히는 것은 훌륭한 계략이었다. 과거 거만하기만 하던 베난이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갑자기 똑똑해지기라도 한 걸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베난뿐 아니라 오스테라의 참주 발니오마저도 최근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영리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발니오는 베난을 구조해 새 제국을 세워 파비트라를 교란한 것은 물론 누이아 대륙에서 들어오는 무역선의 기착지를 옮기는 방법으로 오스테라 주변의 작은 항구도시들을 실질적으로 오스테라 지배 하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북쪽 해안은 류이진이 봉쇄해버려서 큰 성과가 없었지만 남쪽 항구들은 누이안 거류지를 신설하는 등 오스테라의 계략대로 착착 움직여주고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여차할 경우 오스테라가 누이안의 지원을 받아 제국에서 독립할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마저 불러일으키는 행보였다.

 

그게 사실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제국을 충분히 압박할 수 있는 계책이었다. 이렇듯 갑자기 뛰어난 정책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어디선가 새로운 참모가 영입된 것 같다는 심증이 강한데, 이상하게도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페레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다. 파비트라와 약속한 자로갈 마라는 신의를 지키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그와 관계없이 최근 자로갈 마라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하고 있었다. 파비트라와의 전쟁에서 진 여파로 인한 몰락이었다. 새롭게 떠오른 반월 부족은 처음부터 파비트라 황제를 적으로 돌리고 제국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그 뒤에는 역시 오스테라의 조종이 있으리라는 것이 메레디스의 판단이었다. 정체 모를 오스테라의 책략가는 파비트라가 직접 원정에 나서서 해결한 문제를, 플레이어를 바꿔버리는 것으로 간단히 원점으로 되돌린 것이다. 부족들 사이의 세력 부침이 심한 페레들의 특성을 정확히 이용한 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메레디스의 제안은 다음과 같았다. 이대로라면 페레 정벌이 한 번 더 필요하며 적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지 전에, 즉 빠를수록 좋다. 다만 이번에는 황제가 나서기보다 탑의 도시에서 정벌군을 출진시킬 테니 황도에서 지원군을 보내 연합군을 형성하자는 것이었다.

그것까지는 파비트라도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두 번이나 정벌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오스테라를 등진 탑의 도시에서 대군을 파병하게 해서도 안 되었다.

그런데 이어진 진언이 파비트라를 혼란스럽게 했다. 메레디스는 지원군을 이샤마 황태자가 이끄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파비트라가 보는 이샤마는 여전히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였다. 하지만 이샤마는 이미 성인이었거니와 앞으로 황위를 물려받을 황태자로서 군대 경험을 쌓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다. 메레디스 같은 현명한 노장과 함께 첫 전투를 치러보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구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비트라는 한참이나 망설였다. 과거 비파 항구를 정벌하도록 떠나보냈던 이스밀의 잔영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날의 그 결정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꿔놓았는지 몰랐다. 그 뒤로 기나긴 이별을 견딘 파비트라와 이스밀에게 허락되었던 것은 단 하룻밤의 재회뿐이었다. 이제는 전생인 듯 꿈인 듯 느껴질 정도로 옛 일이었지만, 그날 높은 탑에 올라 떠나던 이스밀을 바라보던 기억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때 나디르가 찾아와 마음이 약해진 파비트라를 설득했다. 이스밀은 나디르가 충심으로 따랐던 유일한 주군이자 완벽한 영웅이었고, 이샤마는 그런 이스밀의 아들이었다. 나디르는 주군의 아들이 호랑이처럼 자라기를 바랐지, 궁중에서 유약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니, 실은 나디르가 보기에 이미 그런 상태였다. 그 무렵 이샤마는 황궁의 서고에 틀어박혀 옛 책을 읽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이샤마가 읽는 것은 원대륙 시절의 전설 및 기록들이어서 군주가 되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몸을 단련하는 기색도 없었다.

 

황태자에게 제국을 다스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현실을 깨닫게 하자는 나디르의 말에 설득된 파비트라는 이샤마를 첫 원정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느닷없는 명을 받은 이샤마는 몹시 당황했다. 참전 경험조차 없는데 전쟁 지휘라니 상상도 안 가는 일인 데다 무엇보다 이샤마는 페레들을 좋아했다. 과거 알키미와 함께 지내는 동안 페레들이 정착민보다 더 고결한 존재라는 인상마저 받았다. 그런데 원정의 목표가 바로 페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샤마의 기분이 어떻든, 이샤마가 보아온 어머니는 감상적인 이유로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페레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 따위는 별 소용이 없을 게 뻔했다.

사실, 파비트라도 마음속으로는 감상적일 때가 많았고, 특히 이번 결정이 어려웠던 이유야말로 감상적인 문제였지만 부모를 어려워하는 자식들이 흔히 그렇듯 이샤마는 어머니가 애써 감춘 연약함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간 이샤마는 또래보다는 스승들에게 둘러싸여 지내왔기에 서고는 그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 과거 황도를 떠나기 전에도 그랬다. 그런 식이었으니 이샤마가 연마한 학문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스승들과 대등하게 의견을 나눌 정도였다.

하지만 파비트라는 그런 점을 잘 알지 못했다. 이샤마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폭풍에 쫓기듯 내달리며 살아온 파비트라는 국정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학문의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샤마도 그걸 알았기에 자신이 무엇에 열정을 느끼는지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이샤마를 중심으로 새롭게 페레 원정군을 짜면서 파비트라는 남방 원정군에도 추가 군대를 편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양쪽으로 전쟁을 수행하려니 여유가 부족한 데다 지휘관으로 마땅한 적임자도 없었다. 급한 대로 연의군 출신의 노장 제르보가에게 병사 1만을 주어 보냈지만 파비트라는 줄곧 이대로라면 남방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리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 무렵, 오스테라에서는 메레디스가 알아보았듯 놀라운 전략들이 착착 진행되는 중이었다. 파비트라에게 남방 원정의 숙제를 안겨주고, 일단 해결했다고 생각한 페레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작은 항구들을 하나씩 끌어들여 류이진을 압박하고, 누이안 거류지를 늘려서 이후 전쟁이 일어날 경우 누이안 군대의 참전을 유도하도록 준비해 놓았다.

모든 일은 잘 되어갔다. 참주 발니오는 만족한 나머지 이미 파비트라에게 승리한 것처럼 우쭐해졌다. 물론 그는 뛰어난 참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할 정도의 영리함과 행동력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현명함은 거기까지였다.

아르카디오는 그렇지 않았다.

 

발니오가 아무런 경력도 없는 아르카디오의 말을 들어주고 실행해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말아달라는 요구를 철저히 지켜준 것은 고맙기까지 했다. 전략의 실행 과정에서 운도 상당히 따랐다. 그 운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인가? 아르카디오는 행운에 감사할 겸손함을 갖췄지만 행운을 믿지는 않았다.

그 모든 노력과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르카디오는 언젠가 다가올 최후의 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스테라는 끝내 제국에게 승리할 것인가? 아니다. 패배할 가능성이 크다.

 

아르카디오는 자신이 여전히 최초의 의견을 바꾸지 않았음을 이제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부심 높은 오스테라 사람들은 승리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패배에는 관심이 없었다. 패배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쁜 예언을 차마 말하지 못한 예언자처럼, 아르카디오는 오스테라의 활기를 냉담한 눈으로 바라봤다.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므로 자신은 계속해서 그림자 속에 남아 있어야 했다.

최후의 날, 칼리오 아르카디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20화

 

페레 원정을 이끌도록 결정된 후, 이샤마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간 그에게는 파비트라가 모르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차마 어머니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시작은 오래 전이었다. 알키미와 함께 페레 부락에서 지내다가 황궁으로 돌아왔을 무렵부터 이샤마는 황위 계승에 관심이 없어졌다. 어린 나이부터 보고 겪은 정치가 하필 너무 가혹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파비트라도 견디기 힘들었던 시절인데 어린 이샤마에게는 어떠했겠는가.

성품이 온화한 이샤마는 평화를 갈망했고, 평화로운 시대에 살 수 없다면 마음의 평화라도 얻고자 했다. 그는 점차 지금이 아닌 다른 시대, 태평성대의 풍경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좀 더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성군이 되었을지도 모를 황태자의 열정은 현실을 도피하려는 것처럼 까마득한 옛날, 모든 문명이 꽃피었다던 원대륙 시절로 향했다.

 

원대륙, 즉 대이주 이전의 세계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절의 문화며 학문, 마법이 모두 지금보다 훨씬 발전된 것이었다는 기록만은 공통적이었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유산은 다 어디로 갔을까?

황태자의 권한으로 황궁 서고의 비밀 자료에 접근한 이샤마는 오랫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정보를 속속 발견했다. 무엇보다 신비한 ‘정원’과 최초의 원정대에 대해 읽은 그는 그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세계의 수도로 불린 위대한 도시의 도서관, 자유롭게 학문을 연마하다가 근원에 대한 의문을 품고 세계의 중심으로 떠난 그들…….

 

그러나 그들과 달리 황태자는 정원을 찾으러 갈 수 없었다. 이미 갈 수 없는 땅이었고, 갈 수 없는 신분이었다.

정원에서 돌아온 신들이 지배한 시대, 그리고 그 시대를 바로잡으려 한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놀라웠다. 자신이 저 위대한 시대에 태어나 그 사건들을 목격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즈음 이샤마는 제국에서 섬기던 신들에 대한 신앙심을 잃었다. 그가 원하는 비밀은 정원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샤마는 꿈을 꾸었다.

꿈에 나타난 신성한 여인은 이샤마가 가장 궁금해 하던 것, 즉 제국이 섬기는 이런 저런 신들이 아닌 세상을 창조한 ‘어머니’가 따로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왜 세상을 창조했는지 그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문제의 ‘정원’에 들어가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샤마가 살아가는 동안은 그 정원으로 가는 길이 열리지 않으리라고 했다. 이샤마는 크게 실망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너는 정원에 들어가지 못할 운명이지만, 네 후손들은 그곳에 갈 것이다. 그러나 정원에 들어가려면 많은 것을 준비하고 깨달아야만 한다. 만약 네 후손들이 준비 없이 정원 앞에 이른다면 세계는 한 번 더 최후의 전쟁을 겪게 될 것이다.

 

이샤마는 후손들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자신이 그들을 도울 방법은 없을까?

여인은 먼저 후손들이 원대륙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그때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을 테고, 더 나아가 어머니의 뜻도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원대륙에서 정확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것이야말로 이샤마가 처음부터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이샤마 역시 후손들처럼 알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준비되지 않았기에, 알려주더라도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걸 막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하리라. 결국 지식만으로는 필연적으로 무가치하리라.

 

여인은 사라졌고, 이샤마는 절망한 채로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꿈을 잊지 못했다. 그 시절의 일을 알지도 못하지만 알아도 소용없다면 자신은, 그리고 후손들은 어떻게 해야 준비가 된단 말인가?

과거 정원에 다녀온 열두 명이 서로 뜻이 달라 신들과 영웅들로 갈려 싸웠다는 것, 그래서 최후의 전쟁이 일어나 원대륙이 파멸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러했다면 후손들도 정원에 들어가는 동시에 똑같은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 결과 그때와 같은 다툼과 전쟁, 파멸이 닥친다면? 그건 이샤마가 진저리 쳐 온 가혹한 제국의 내분과도 비교되지 않는 재앙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후손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는 대신 깨달음을 얻게 될까?

그런 생각에 빠진 채 몇 달이 흐른 뒤 이샤마는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신비한 여인이 아니라 왕궁처럼 보이는 화려한 방이었다. 제국의 황궁은 분명히 아니었고, 이샤마가 아는 한 근방의 어느 나라도 아닌 낯선 문물이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무희가 갇혀 있었다. 그녀는 떨고 있다가 마침내 부름을 받아 왕의 침실로 들어갔다.

꿈속의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가 이윽고 그녀는 아기를 갖고, 귀한 대접을 받다가 왕자를 출산했다. 왕비는 시기심에 사로잡혀 무희와 아기를 죽이려 했지만 무희는 간신히 아기를 안고 거리로 달아났다. 고초 끝에 한 남자의 도움을 받게 된 그녀는 멀리 도망쳐서 아기를 키웠다.

 

이샤마는 과거 어머니가 일찍이 황궁 밖으로 탈출해 고귀한 신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음을 전해 들었고, 비록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할망정 자신 또한 그 시절을 함께 겪었다. 그랬기에 꿈속의 풍경은 마치 파비트라와 이샤마의 뒷모습 같았다. 이샤마는 쉽사리 그들의 감정을 이해했다.

꿈속의 모자는 수년 간 고생한 끝에 한 대신의 방문을 받게 되면서 방랑에 종지부를 찍었다. 마지막 장면은 여자아이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왕자 앞에 대신이 무릎을 꿇으며 ‘에페리움의 위대한 수호자 로안드로스 국왕 폐하의 아드님이신 폴리티모스 왕자님을 삼가 뵙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이샤마는 에페리움, 로안드로스, 폴리티모스 등의 이름을 떠올리며 시종에게 기록을 뒤져보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눈앞에 생생한 장면들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가 그림으로 그려 보았다.

물론 이샤마는 화가가 아니었으므로 마음먹은 대로 잘 될 리 없었다. 그는 온갖 장면을 떠올리며 수십 장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한 장을 그려냈다. 이샤마는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림이란 쉽사리 사라지는 것이었다.

 

기록을 찾아보니 에페리움은 원대륙에 있었던 나라의 이름이 맞았다. 로안드로스라는 왕이 있었던 것도 틀림없었다. 다만 폴리티모스라는 이름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후 이샤마는 날마다 꿈을 꾸었다. 이야기는 연결되었다. 폴리티모스 왕자가 어떻게 왕궁으로 돌아갔는지, 동생 팔라소스와는 어떻게 지냈는지, 어머니 에렉티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변해 갔는지, 마침내 어떻게 성장했는지, 이샤마는 그 모두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는 잠에서 깨면 늘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도 뭔가 미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폴리티모스 왕자를 찾아왔던 대신의 이름은 안탈론이었다. 그 이름은 이샤마도 알고 있었다. 기록 속의 안탈론은 최후의 전쟁에서 전쟁과 파괴의 신 키리오스를 보좌했던 사악한 마법사이자 불사의 존재로 기록되어 있었다. 다만 최후의 전쟁 시대와 로안드로스 왕의 시대 사이에는 수백 년이 가로놓여 있었기에 이 대신과 사악한 마법사가 동일 인물일 리는 없었다. 그렇더라도 무슨 관계가 있지는 않을까 싶기도 했다.

 

꿈을 꾸고 그림을 그리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이샤마는 꿈속의 이야기에 푹 빠져 낮에도 몽롱하게 지낼 때가 많았다. 황태자의 그런 모습은 많은 사람의 근심을 샀다. 특히 나디르는 그런 꼴을 못 견뎌했다. 마주칠 때마다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다가 무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늙은 신하의 특권을 방패 삼아 몇 번이나 잔소리까지 했을 정도였다.

페레 정벌군을 이끌라는 파비트라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 그때였다. 이샤마는 차마 명을 거역하지 못했지만 내심 걱정이 컸다. 지금 자신의 상태로 뭘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사실상 군대를 이끄는 것은 다른 장군이고 이샤마는 명목상의 총대장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날마다 꿈에 취한 상태로 전쟁터에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자마 꿈이 사라져버렸다.

이샤마의 상태는 한결 좋아졌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감을 누를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이 전쟁과 같은 불경한 일을 저지르려 했기 때문에 신성한 꿈이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

 

그렇든 아니든,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꿈을 되찾기 위해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샤마는 군대를 이끌고 메레디스 장군과 합류해 페레 부족들과 전투를 벌였다. 페레들은 막 권력이 교체되는 시기여서 단합되지 못했기에 신중하게 페레들을 관찰해 온 메레디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메레디스는 황태자를 뒷전에서 구경만 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또한 나디르와 뜻이 같았던 것이다.

이샤마는 비록 호위병들로 둘러싸이긴 했지만 실제로 전투에 참여해야 했다. 승전이 이어지면서 점차 정복전은 학살에 가깝게 변해갔다.

 

이샤마도 한동안은 어떻게든 버티려 했다. 황태자에게 전쟁 경험이 필요하다는 어머니의 뜻도, 메레디스의 뜻도 이해했고, 따르려고 노력도 해 보았다. 어머니도 전쟁터에서 이런 일을 늘 겪었겠거니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학살은 공포와 역겨움을 안겨 줄 뿐이었다. 부락을 불태우고 여자나 어린이까지 가차 없이 죽이는 일이 계속되자 점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메레디스도 본래는 이런 식으로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하지만 페레들은 한 번 여제의 자비를 받았으면서 다시 거역했기에, 이번에는 무자비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을 비록 머리로는 알았다 한들, 첫 전쟁에 내던져진 황태자가 마음으로 공감할 순 없었다.

 

이샤마는 전장을 이탈했다. 비록 황도로 돌아갈 길도 몰랐지만 전쟁터의 소음과 피로부터 멀어지기만 하면 된다는 기분이었다. 정처 없이 걷던 이샤마는 어느새 로카의 장기말들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페레 부락을 발견했다.

그간 정벌군이 페레를 학살해 왔으니 비록 황태자의 신분을 모르더라도 적대적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 부락은 그렇지 않았다. 페레들은 황태자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침착하게 환대하며 주술사에게 안내했다.

 

주술사가 준 술을 마신 이샤마는 환각을 보게 되었다. 다름 아닌, 폐허가 된 제국 황도의 모습이었다.

잘 구획되어 있던 궁전과 길, 저수지와 성벽에서는 잡초가 자랐고, 신전은 무너졌으며, 정글이 도시를 침범하고 있었다. 새와 짐승들이 어슬렁거릴 뿐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얼씬하지 않았다.

 

 

21화

 

이튿날, 잠에서 깨어난 이샤마 황태자는 주술사에게 자신이 본 환각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주술사는 그 의미는 당신이 이곳으로 돌아오는 날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샤마가 메레디스 장군의 군대로 돌아간 후 얼마 안 가 페레 정벌은 끝이 났다. 메레디스는 이샤마가 사라진 것을 알고도 황태자가 병환중이라고 하며 사람들에게 전장 이탈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온 후에도 비밀을 지켜 주었다. 그랬기에 파비트라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파비트라는 황태자가 주변의 우려를 뚫고 훌륭하게 정벌전을 수행했다고 생각해 몹시 기뻐했다. 이제 아들을 좀 믿어도 될 성싶었다. 동시에 온후하면서도 엄격한 메레디스가 황태자의 스승으로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메레디스를 황도에 남게 하고, 대신 나디르를 탑의 도시로 보내는 인사를 전격 단행했다. 마음의 반은 탑의 도시에 가 있던 나디르로서는 뛸 듯이 반가운 명이기도 했다.



그 무렵, 남방 원정을 떠난 알키미가 베난의 주둔지를 찾아내어 전초전을 벌였고, 포위에 들어갔다고 알려 왔다. 이제 페레 걱정이 없어진 파비트라는 몸소 원정군을 이끌고 남방 원정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이 궁을 비운 동안 이샤마를 섭정으로 임명해 이번에는 통치의 경험을 쌓게 할 계획도 있었다. 메레디스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에도 훌륭히 해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샤마의 백일몽 증상은 궁으로 돌아온 뒤 더욱 심해졌다. 그는 페레 부락에서 본 환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멀쩡한 궁정을 돌아다니면서도 문득문득 그때 본 환각이 눈앞에서 겹쳐졌다. 이렇게 훌륭한 궁전이 어떻게 그런 폐허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제국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폐허가 된 수도의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눈앞의 영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허망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강해져 갔다. 국정은 사실상 메레디스가 알아서 이끌어 가는 형편이었다. 메레디스는 이샤마의 상태를 알았지만 뜻밖에도 질책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한편, 파비트라가 남방 전선에 합류하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베난 군이 전면 공세로 나왔다.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메레디스가 알려준 정보에 따르면 베난이 파비트라를 남방 전선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하면 오스테라가 황도를 공략하기로 약조되어 있었다. 그들의 밀약이 성립하려면 베난 군은 계속해서 여제의 관심을 끌어야 했다.
나밀과 제니리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정보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어느 날, 남방 원정군은 날마다 벌어지던 교전에서 일부러 지리멸렬하게 물러섰다. 그리고 그날 밤, 갑자기 철군을 단행해 베난 군의 진영으로부터 멀찍이 떠나왔다.



하루 밤낮도 지나기 전에 베난 군은 헐레벌떡 여제의 군대를 뒤쫓아 왔다. 여제의 깃발을 세워둔 곳으로 유인된 베난 군은 협곡 안쪽으로 들어섰고, 기다리고 있던 알키미의 매복군이 그들을 덮쳤다. 주력군은 어느새 알키미를 잘 따르게 된 연의군이었다.
연의군의 사나운 공격을 받은 베난 군은 패주했다. 무엇보다 베난이 사로잡힌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나머지는 허겁지겁 본영으로 달아났으나 그곳은 이미 나밀이 이끄는 별동대가 점거해버린 뒤였다. 이 전투를 통해 나밀은 참모뿐 아니라 지휘관으로서의 자질도 있음을 입증했다.



모두가 기다리던 승전보가 황도에 날아들었다. 마침내 남방 지역이 여제에게 완전히 복속되어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제국의 역사상 처음 있는 쾌거였다.
온 황도가 기쁨으로 술렁였다. 곧 돌아올 여제와 원정군을 위한 환영식이 대대적으로 준비되었다. 이샤마는 그런 것이 다 무슨 의미인가 싶었지만 차마 내색하지는 못했다. ‘무너질 제국에 땅 한 조각을 더하면 달라진단 말인가. 어차피 그 땅은 거기에 계속 살아가는 자들의 것일 뿐이다’



파비트라가 황도로 개선하자 사흘 동안 축제가 벌어졌다. 황도로 진군 중이라던 오스테라 군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종적도 찾기 힘들다고 했다. 황도에서는 어딜 가나 여제를 칭송하고 오스테라 인들을 비웃는 이야기가 오갔다. 글에서도, 그림에서도, 아이들의 노랫소리 속에서도 흘러나왔다.
재상이 된 메레디스는 여제의 권위를 전 제국에 떨치기 위해 원정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했다. 비파 항구를 재점령했던 북방 원정, 탑의 도시를 되찾았던 서방 원정, 로칼로카 산맥에서 페레를 내쫓은 동방 원정, 그리고 이번 남방 원정까지, 네 개의 기념비가 계획되었다.



하지만 이샤마는 그 모든 영광이나 기쁨과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는 다시 꿈을 꾸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폴리티모스 왕자는 어머니와 반목하고 에페리움을 떠나갔다. 이후 새로운 성이 나타나더니 영주의 손녀이지만 부엌데기 취급을 받는 소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성에 소녀의 누이동생이라는 아기를 두고 갔고, 우여곡절 끝에 소녀는 아기를 직접 키우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샤마의 그림 실력은 궁정 화가 못지않았다. 그려 놓은 그림은 수백 장에 이르렀다. 그는 그림을 소중히 여기며 누구도 훼손하지 못하게 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이샤마는 그림을 바라보다가 종이와 안료가 바랜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 아무리 소중히 여겨도 그림이란 수십 년, 또는 수백 년이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시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문득 폐허로 변한 하리하랄라야의 환각이 떠올랐다.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을 뿐, 그림은 바래고 하리하랄라야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인간인 자신은 그 중 어느 쪽도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뭔가를 이룩하고 남긴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날 밤, 이샤마의 꿈에서는 소녀가 동생과 함께 성을 떠나 델피나드로 가는 모습이 나타났다. 언덕에서 사촌오빠와 작별한 소녀가 돌아섰을 때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얼굴이 익숙했다. 수 년 전, 처음으로 꾸었던 특별한 꿈에 나타났던 신성한 여인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제야 이샤마는 그녀가 신이 아니라 오래 전 정원에 들어갔다던 영웅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정원에 들어갔던 영웅들의 과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록도 없고, 구전조차 없는 그들의 삶이 자신의 꿈속에만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사라진 역사가 그의 꿈속에 있었다.



신성한 여인은 후손들이 원대륙이 겪은 일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기록은 적은데다 훼손되어 있었고, 왕실 창고에 갇혀 있었고, 무엇보다 누구도 들춰보지 않았다. 후손들이 알려 해도 알 길이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신성한 여인이 이샤마에게 원대륙에서 있었던 일을 보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는 이유는 후손들이 먼 훗날 정원 앞에 이르기 전에 ‘준비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꿈에서 여인을 보았을 때 그녀는 이샤마조차 준비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후손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비록 이샤마 자신은 정원에 갈 수 없다 해도 언젠가 후손들은 갈 것이다. 그는 후손이 준비되도록 하는 일에 자신이 쓰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결국 무(無)로 돌아가고 말 대륙 정복 같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었다. 후손들의 미래가 그의 꿈과 기록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제국의 황태자였다. 언젠가는 제국을 물려받아야 할 것이다. 그가 이 작업에 여생을 온전히 바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꿈에 본 ‘전나무의 여왕’ 로지아를 떠올렸다. 자신이 로지아의 아들 레이븐처럼 어머니의 뜻을 저버린다면 여제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날 밤, 이샤마의 꿈에 오랜만에 신성한 여인이 나타났다.
이샤마는 여인에게 자신이 준비되었느냐고 물었다. 여인은 네가 준비되었는지는 너 자신이 가장 잘 알 거라고 했다.
이샤마는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원대륙에서 최후의 전쟁이 일어나는 장면까지 모두 목격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까? 그리고 자신이 그걸 다 본다 한들 기록해 남길 수는 있을까? 그림으로 그린다면 또 얼마나 보존될까? 작은 불길 한 번이면 사라져버리는 것이 종이에 그린 그림이 아닌가?



마침내 이샤마는 자신이 황태자만 아니라면 이 과업을 위해 남은 생애를 바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고, 따라서 자신은 준비되지 않은 자였다.
그는 여인에게 이런 중대한 일에 왜 나를 택했느냐고, 다른 사람을 택했다면 이런 문제는 없지 않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인이 답했다.




“네가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내가 보여주는 무늬를 잘 기억하고 있다가 깨어나 그리도록 하라. 한 번에 기억하지 못할 테니 여러 번의 꿈에 걸쳐 보며 매번 작은 부분만이라도 기억해서 정확하게 그리도록 하라. 또한 그림은 영원하지 않으므로 너는 그것을 새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 너는 ‘성스러운 자의 공양(供養)’을 찾도록 하라. 그것은 원대륙에서 온 물건으로 하리하랄라야 왕궁에 보관되어 있다. 너는 네가 그린 무늬를 ‘성스러운 자의 공양’ 위에 새겨야 한다. 네가 그것을 다 새기는 날, 너는 네가 준비된 자인지 알게 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이샤마는 황궁 창고를 수색하게 했다. 그곳에는 정말로 ‘성스러운 자의 공양’이라는 물건이 있었다. 마치 물을 담을 때처럼 두 손바닥을 오므려 내민 모양의 흑요석 조각이었는데 가운데가 이상하게 조각되지 않고 비어 있었다. 마치 그 위에 뭔가를 새기라는 것 같았다.

 

 

22화

 

파비트라의 남방 원정 성공은 오스테라의 멸망을 알리는 장송곡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남방 원정이 가능한 한 오래 시간을 끌어주길 바랐다. 그 사이에 외교와 책략으로 국경 도시들을 흔들어 파비트라의 운신의 폭을 좁혀보려 했다.
그러나 베난은 성급했고, 파비트라는 용의주도했다. 파비트라에게는 용맹한 알키미와 영리한 나밀, 진중한 메레디스도 있었으나 베난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륙 최고의 책사인 류이진이 지키는 비파 항구나, 옛 주군의 도시를 지키려는 충정이 지나칠 정도인 나디르가 다스리는 탑의 도시도 공략 가능성은 없었다. 페레를 이용해보려 한 계략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파비트라가 원정 기념비를 네 곳에 세운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오스테라 사람들은 동요했다. 기념비의 의미는 제국의 완성이었다. 이제 여제에게 숙이지 않은 유일한 땅은 단 하나, 오스테라뿐이었다. 가장 부유하되 가장 충성스럽지 못한 도시, 완전히 지배된 적이 없는 땅. 여제가 그들을 내버려둘 것인가?
기념비의 의미는 스스로 숙이고 들어오라는 뜻일까? 아니면 곧 짓밟을 테니 각오하라는 뜻일까? 오스테라 안에서도 온갖 예상이 오고갔다.


일부는 이것으로 제국이 완성되었으니 오스테라를 내버려두겠다는 뜻이 아니냐고도 했지만 지난 일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낙관적 추측을 비웃었다. 여제는 결코 오스테라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오스테라는 이스밀을 죽였고, 여제가 제국을 거의 잃을 뻔하게 만들었다. 그런 반역자들을 그냥 두고서 제국의 안녕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제의 오스테라 원정을 막는 걸림돌은 모두 없어졌다. 전쟁은 시간 문제였다.


이 무렵, 발니오는 더 이상 아르카디오의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 그간 아르카디오가 해 준 모든 조언이 승리의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전제한 채 마지못해 낸 차선, 또는 차차선의 계략이었을 뿐임을 이미 잊은 까닭이었다.
그걸 잊은 자의 눈으로 보기에 아르카디오의 모든 계략은 실패로 돌아간 듯했다. 그나마 남은 누이안 거류지 정책조차 이즈나 왕가의 내부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그들의 개입을 기대하기는 힘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류이진이 침투시킨 첩자들이 오스테라에 불안한 소문을 퍼뜨렸다. 여제가 편성한 원정군이 사상 최대 규모라는 소문, 출병 준비를 마치고 신전에서 날을 택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 발니오는 술독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소문 등이 퍼진 가운데 여제가 오스테라가 스스로 항복해 오지 않는 것에 분노했다는 소문이 뒤를 이었다.
점차 빨리 항복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여론이 커져갔다. 예전에 아르카디오가 광장의 점포를 세내어 했던 문답이 새삼스럽게 돌아다녔다. 아르카디오를 흉내 내어 연설대를 만든 자도 여럿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스테라의 종말이 가까워졌다’를 외쳤다.
반면 그 방면의 원조인 아르카디오는 자기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스테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의견을 얻고자 찾아왔지만, 그는 만나고 싶지 않다며 모두 물리쳤다.


발니오는 술독에 빠져 세월을 보내고 있지 않았다. 그도 나름대로 살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 희생양이 필요했다. 과거 사람들이 발니오의 목을 잘라 여제의 자비를 구하면 어떨까 생각했듯, 발니오는 또 다른 사람의 목을 잘라 바치면 어떨까 생각했다. 바로 카타니아 황녀의 목을.


그간 카타니아 황녀는 발니오의 비호를 받으며 그의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 한때 발니오는 카타니아로부터 이샤마 황태자가 이스밀의 자식일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같은 방법으로 제 자식을 황위에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그렇게 시작된 밀월이었고, 그런 그들의 관계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심지어 발니오는 사석에서 술을 마시며 자신을 황제의 사위라고 칭한 일도 있었다.
그런 주제에 발니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계책을 떠올렸고, 카타니아도 금세 그런 기색을 눈치 챘다. 그녀야말로 긴 세월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눈치로 잔뼈가 굵은 몸이었다.


카타니아는 밤을 틈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달아났다. 오스테라를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여제가 대륙을 통일하다시피 했기에 더 이상 뒷일을 도모할 땅이 없었다. 누가 그녀를 받아줄 것인가? 파비트라의 맏언니이지만 동시에 철천지원수인 그녀를?
발니오의 추적을 피해 이리저리 헤매다가 지칠 대로 지쳤을 때 카타니아는 어느 노부부의 호의로 시골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그녀는 신분을 숨긴 채, 남편을 찾아가려고 오스테라를 떠났으나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갈 곳이 없어졌다고 둘러댔다.


노부부는 친절해서 이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라며 작은 집을 내어주고 텃밭도 가꾸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카타니아는 그런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시골 아낙네가 되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극도로 우울해져 신경 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순간적 착란에 빠져 자기 아이 중 하나를 거의 죽일 뻔했다.
이튿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부부가 아이들을 어디론가 보내버린 뒤였다. 카타니아는 아이들을 내놓으라고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노부부는 미친 여자에게 아이들을 돌려줘선 안 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절망에 빠져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던 카타니아는 아이들을 되찾지 못하자 마침내 발광했다. 미쳐버린 카타니아의 입에서는 온갖 비밀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노부부를 비롯한 시골 사람들은 그녀의 두서없는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고, 다만 파비트라 여제를 집요하게 욕하는 것 때문에 겁을 먹어 그녀를 창고에 가두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헤매는 어머니에게 인정을 발휘했던 노부부도 미친 여자에게는 냉담했다. 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만 넣어 줄 뿐, 해도 들지 않는 창고에 갇혀 있던 카타니아는 어느 날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다른 사고로 그런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당시 노부부는 카타니아의 아이들을 오스테라 근처 소도시에 사는 친척들에게 보냈지만, 남의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는 것이 귀찮아진 그들은 아이들을 아무에게나 양자로 주어버렸다. 한 집에서 데려간 것도 아니어서 두 아이는 그들끼리도 떨어졌다. 그 후 전쟁이 벌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는 가운데 그들을 데려간 가족들도 어디론가 떠나갔다.
비록 출생이 기구하긴 해도 카타니아의 아이들은 황족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은 그들의 행방을 추적했다. 하지만 죽은 카타니아는 묻힌 곳도 찾을 수가 없었고, 아이들은 행방이 묘연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파비트라는 오스테라 원정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해갔다. 숙원이었던 이스밀의 복수였기에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을 보이자 그녀는 황궁의 재산인 금붙이와 개인적인 패물을 아낌없이 처분했다. 내탕금도 원정 준비에 쓰도록 내놓았다.
탑의 도시의 나디르, 비파 항구의 류이진도 군대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십만 대군이 오스테라를 완전히 둘러싸게 되리라. 그러려면 엄청난 지출을 각오해야 했지만 또한 오스테라는 하리하라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이기도 했다. 원정에 성공하면 그 도시의 부는 제국에 골고루 분배될 것이었다.


파비트라는 이번이 마지막 원정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도 나이가 들었다. 전쟁터보다는 궁에서 머무는 편이 어울리는 나이였다. 어쩌면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기에도 적당한 나이일지 몰랐다.
하지만 이샤마는 언제부터인가 흑요석 조각을 붙들고 궁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어느 날, 파비트라는 굳은 마음을 먹고 아들을 불렀다.



“황위에 오른 후 어언 수십 년, 그간 나는 제국을 얻고, 잃고, 되찾았다. 그러면서 많은 일을 보고 겪었다. 제국을 얻는 것은 어렵지만 지켜내는 것은 더 어려우며, 다스리는 것은 더더욱 어렵더구나. 나도 그 도리를 지난 전쟁들 속에서 겨우 깨우쳤다. 황제는 일면식조차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편과 소원을 알고 공평하게 다스려야 한다. 하지만 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느냐? 진실을 말하자면 제국의 신민들은 황제가 없어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렇기에 황제는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하는 존재여야 하느니라. 그렇지 않다면 없느니만 못한 것이다.”



말하는 동안 파란만장한 과거가 머릿속을 스쳐가 파비트라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해졌다. 동시에 고난 속에서 뼈에 새긴 교훈을 말하고 있건만, 이샤마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지 조바심이 일었다. 아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 원정은 내 마지막 출정이 될 것이다. 오스테라에서 승리한 뒤 돌아오면 태자는 그날로부터 그림이나 조각 따위의 쓸데없는 일은 모두 그만두도록 하여라. 내가 직접 군왕의 도리를 가르칠 것이다. 어미는 네가 준비가 되었을 때 황위에서 물러나 쉬고 싶다. 어서 나를 편히 쉬게 해다오.”



이샤마는 대답이 없었다.
파비트라도 마음속으로는 수천 번 말하고 싶었다. 죽은 이스밀이 너의 아버지이며, 이번 원정은 그를 위한 복수라고. 낙조대의 난 이후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산해진미의 맛도 몰랐고 어떤 즐겁고 우스운 일에도 진정으로 웃지 못했지만, 그 원한을 갚고 나면 단 하룻밤이라도 편히 잠들 것 같다고. 너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그녀 자신과 이스밀이 어떤 시련을 감수했는지 아느냐고. 이스밀을 잃은 자신에게 이샤마가 황위에 올라 훌륭히 다스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간절한 소원인지 아느냐고.


그러나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제 자리에 미련이 없어 보이는 이샤마에게 빌미를 만들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또한 이스밀의 죽음이 이샤마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원치 않아서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샤마는 황제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훌륭하게 다스려 다시는 제국을 잃지 않아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저승에 가서도 이스밀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을 것이다.


그해 가을, 파비트라가 일으킨 오스테라 원정군은 황도를 떠나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파비트라 대 여제의 최후의 진군이었다.

 

 

23화

 

기나긴 진군 끝에 탑의 도시에 도착한 파비트라는 나디르의 영접을 받으며 반가운 얼굴과 마주했다. 류이진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제와 류이진은 일엽편주에 황제와 신하 하나, 서로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던 시절을 함께 했던 사이였다. 그랬건만 비파 항구를 맡기고 황도로 떠난 후로는 단 한 번도 재회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나보니 늘 젊다고만 생각했던 류이진도 어느새 나이가 들었다. 난데없이 이스밀을 찾아와 정세를 줄줄 읊던 류이진은 늘 중책을 맡기기에 지나치게 어려 보이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간 류이진은 비파 항구를 지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융성시키고 확장해 제국 3대 도시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동방 출신인 류이진이 적극적으로 도입한 농사 기술은 이미 정착 단계였고, 동방풍의 건물도 많이 들어서서 도심지는 언뜻 베로에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 직접 키운 정예병도 완벽히 장악하고 있어 이니스테르의 땅을 매번 땅따먹기 하듯 조금씩 잘라먹고 있는데 항의를 받아도 댈 핑계가 백가지씩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한때 재계약을 하느니 마느니 할 정도로 충성심하고 거리가 멀던 류이진이 어느새 여제의 첫째가는 충신이라니 세월이 만드는 변화는 놀라웠다. 그렇게 되기까지 겪은 일을 생각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폐하께서도 이제 예전 같은 미모는 아니시군요. 뭐, 저도 그렇지만. 폐하나 소신이나 제국이라는 괴물한테 피를 빨리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죠.”




별실에 마주 앉아 첫 마디를 들으니 옛 생각이 새록새록 났다. 류이진은 새파랗게 젊고 놀랄 만큼 영리했지만, 동시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교만하기도 했었다. 파비트라는 웃었다. 동시에 눈물이 고였다. 제국을 되찾고 지켜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쉬지 않고 달려왔다. 류이진도 그들 중 하나였다. 파비트라와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이제는 류이진이 유일했다.




“경이야말로 그 넘치는 재능으로 변경 도시 하나를 지키자니 힘이 남아돌지 않았어? 황도에서 연달아 일이 터질 때 경의 존재가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를 거야.”




“제국을 경륜해야 할 소신이 어촌에서 한가로이 지내는 건 대륙적인 낭비였습니다만 그 결과 비파 항구를 어떤 땅보다도 훌륭하게 변모시켰다고 자부합니다. 소신의 개인적인 생각이오나 나디르 경도 탑의 도시에 대해 자부심만 강하지 이제 비파 항구보다 더 나은 도시라고 하기 어려울 겁니다.”




파비트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알지만 나디르 경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줘. 어쨌든 이번 전쟁은 내 최후의 임무야. 경도 조금만 더 힘내줘.”




류이진은 금세 눈치를 챘다.




“폐하, 설마 양위하려 하십니까?”




“짐도 장차 저세상에 가려면 푹 쉬면서 미색을 되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저세상에 가서 만날 사람이 누구이던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 류이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도 어지간히 끈질기시네요. 하지만 이스밀 공도 끈질기기로는 만만치 않았지요. 재회하시면 엊그제 헤어진 듯하실 겁니다.”




류이진은 반가운 얼굴을 하나 더 소개시켜 주었다. 오래 전, 파비트라의 처벌에 반발해 떠나갔던 마적 두령 케사드였다. 수배를 내리고도 발견되지 않더니, 한때 자신의 지휘관이었던 류이진에게 가서 몸을 의탁했던 모양이었다. 류이진은 명분에 좌우되는 성품이 아니었지만 파비트라가 케사드를 벌했어야 하는 이유를 잘 이해했다. 동시에 그런 케사드가 행방불명인 상태의 장점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케사드는 류이진의 군대에서 홍군의 임시 대장이었다. 파비트라가 케사드를 사면한다면 정식 장군으로 임명할 거라는 말을 듣고 파비트라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이건 협박이나 다를 바 없군. 내가 사면하지 않는다면 홍군의 지휘관이 사라지지 않나.”




류이진은 파비트라를 너무 잘 아는 나머지 질책을 걱정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런 역할을 하라고 소신 같은 신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어찌 보면 파비트라마저 속이고 숨겨뒀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파비트라는 오히려 류이진의 행동이 고마웠다. 그녀 또한 케사드를 수배 내리면서도 발견되지 않기를 빌었었다. 이미 세월이 흘러 그 당시 군율의 문제는 잊혔기에 파비트라는 쉽사리 케사드를 사면해 주었다. 그리고 비파 항구를 탈환할 당시 청군, 녹군, 흑군을 지휘했던, 달칸, 무이곤, 하딤까지 모두 불러 오랜만에 옛 이야기를 하며 어주를 하사했다. 아게우스가 함께하지 못하는 것만이 못내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 시절 새파란 서생 같던 류이진을 가장 못 미더워하던 케사드는 어느새 류이진을 충심으로 따르고 있었다. 케사드가 말했다.




“소신은 연 총독께서 각 군 십여 명에 불과하던 제국 수호군을 정말로 4만 5천으로 만들어내시는 데 놀라 그 후로는 모래와 소금으로 군대를 만든다고 해도 믿게 됐습니다.”




며칠 뒤, 파비트라가 이끄는 황도군과 나디르의 연의군, 류이진이 이끄는 비파항구 군대는 오스테라의 동쪽과 남쪽을 완전히 둘러쌌다.
류이진은 남아돌았다는 힘으로 그 사이 해군까지 키워 바다도 절반 넘게 봉쇄했다. 서남쪽 일부는 열려 있었지만, 큰 배를 댈 공간이 없어 그리로 달아난다는 것은 사실상 패배를 뜻했다. 포위를 마친 후 파비트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면 시민들의 죄는 묻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동시에 어떤 일이 있어도 지배자들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발니오를 비롯한 오스테라의 귀족 가문들은 최후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몇몇은 작은 배를 타고 달아나기를 택했다. 하지만 상당수는 그대로 남았다.
그들이 여제의 군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여제는 압도적인 군세는 물론이거니와 용장 나디르와 대륙 최고의 전략가 류이진을 거느렸다. 그에 반해 오스테라 군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동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테라 귀족들은 부딪쳐 보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자존심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오스테라 인들은 성문을 모조리 폐쇄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오스테라 성벽은 튼튼한 데다 내부의 물자도 풍부해서 수개월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는다면 몇 년까지도 버틸 수 있었다. 그들의 계획을 눈치 챈 파비트라는 류이진에게 먼저 기회를 주었다. 심리전이었다.



류이진은 우선 해군을 움직여 바다 쪽의 시설들을 포격해 겁을 주는 반면 시민들의 탈출을 독려했다. 그 덕택에 귀족들로부터 탈취한 두 대의 탈주선이 넘어왔다. 탈출한 자들은 오스테라의 민심을 이모저모 전했다.
류이진은 탈주자들을 이용해 동요를 유도했다. 동시에 발니오의 목에 포상을 걸고 전 가문의 사면을 약속했다. 그런 다음 반역자 카타니아 황녀를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카타니아를 내놓아서 파비트라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진작 넘겨주었을 테지만, 카타니아가 도망쳐버린 뒤였기에 발니오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류이진도 이미 그런 줄 다 알고 있었다.



발니오는 카타니아가 일찌감치 오스테라를 탈출해버렸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시민들은 발니오와 귀족들이 카타니아를 살리고 싶어 숨겨둔 게 아니냐고 의심했다. 별다른 근거는 없었지만 여제의 군대가 성벽 밑에 닥친 지금, 시민들은 무엇을 넘겨주고라도 여제의 사면을 받고 싶어 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진실이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카타니아만 내놓으면 여제가 오스테라를 용서할지도 모르는데, 오스테라 시민들의 목숨보다 반역자 황녀가 중요하단 말인가?
일찌감치 오스테라 내부에 심어 둔 첩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발니오와 카타니아의 관계에 대해 떠들어댔다. 아르카디오를 흉내 내어 시장에 연단을 만들었던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실은 류이진의 첩자였다. 상대의 수법을 흡수해 역이용하는 것은 류이진의 장기 중 하나였다.



악선전에 견디다 못한 발니오는 연단을 폐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언론을 탄압하는 꼴이 되어 류이진이 퍼뜨린 의혹에 더 불이 붙었다. 연단을 처음 만들었던 아르카디오 때문에 시장 광장의 연단은 어느새 옳은 말을 하는 자들의 자리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그런 연단을 폐쇄한 부작용으로 인해 이제 오스테라 시민들 중 절반 이상은 발니오가 제 자식을 낳은 카타니아를 어딘가에 숨겨 놓았다고 믿게 되었다.



오스테라의 민심 이반이 심각해졌을 무렵, 파비트라는 첫 공성전을 지시했다. 자기 차례가 돌아오는 동안 공성기를 충분히 준비했던 나디르는 기다렸다는 듯 맹공을 퍼부었다. 날이 저물면서 그날의 공세는 겨우 마무리되었지만 오스테라 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공격이 계속된다면 며칠이나 버텨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발니오는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결국 아르카디오에게 조언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밤중에 아르카디오의 집으로 찾아갔던 사자는 그의 집이 텅 비어 있더라는 소식만을 가지고 돌아왔다.
발니오는 아르카디오마저 도망친 것이라고 생각해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모두가 승산이 없다고 본단 말인가? 신들은 이제 오스테라를 버린 것인가?

 

 

24화

 

나디르의 공세 이후 오스테라는 장기 농성 태세에 들어갔다. 아무리 도발해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나오지 않고 성벽만 굳건히 지키는 전략이었다.
이런저런 도발이 전혀 먹히지 않자 나디르는 한동안 공성기로 성문을 부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수 일이 걸려 겉으로 보이는 성문이 반파되고 나서야 이것이 쓸모없는 전략이었음이 밝혀졌다. 오스테라인들은 여제의 출병 소식을 듣고 성문 뒤에 새로운 성벽을 두텁게 쌓아 사실상 입구를 막아버린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성문을 부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른 벽도 지속적으로 보강되는 중이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공성차였지만 류이진이 미리 운반시켜 둔 목재를 다 써버려서 추가 수급이 쉽지 않았다. 주변의 나무는 오스테라인들이 모조리 베어 가버렸다. 결국 비파 항구에서 뱃길로 목재를 실어 오기로 결정했다. 그러자니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오스테라도 사정이 좋지는 않았다. 장기 농성은 보급선이 긴 원정군에게 치명적인 전략이기는 했지만 내부의 사기도 심각하게 떨어뜨리는 단점이 있었다. 식량 징발 및 보급제가 실시되고 해가 진 이후의 통행이 금지되었다. 해안가 봉쇄로 어업 및 무역이 사라진 것은 물론, 농업은 생산 및 수확이 완전히 통제되고 수공업도 마비되었다.
자연스러운 상업 거래 자체가 자취를 감췄다. 술은 생산이 금지되었다. 연회가 사라지고 여흥, 예술, 교육도 사라졌다. 사치품을 생산하던 사람들은 줄줄이 파산했다.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물자의 가격은 암거래 시장에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타지에 가족이 있는 시민들, 특히 황도나 탑의 도시, 비파 항구에서 이주한 자들은 문 밖에 나서지도 못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파비트라와 류이진, 나디르를 욕하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그들을 악귀, 뱀, 돼지 따위로 묘사한 낙서가 거리를 뒤덮었다. 카타니아와 발니오를 욕하는 낙서도 동시에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성벽 너머의 적과 성벽 안의 지배자를 모두 미워했다.
그런 상황이니 탈출을 시도하는 자들도 많았다. 도망치려다 붙잡힌 자들은 광장에서 목이 매달렸다. 어느 날 아침에 나와 보면 이웃이던 일가족이 나란히 매달려 있곤 하는 일이 잦아지자 사람들의 마음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시민들뿐 아니라 귀족들도 두려움에 지배당했다. 겉으로는 ‘오스테라 성벽은 3년이 가도 부서지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했지만 3년이나 이런 꼴로 살 것을 생각하면 아찔한 노릇이었다. 암살 시도를 몇 번 겪은 발니오는 아예 집안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몇 귀족들이 민심을 다잡아보려 했지만 발니오가 꼼짝도 않는 상황에서는 어떤 것도 쉽지 않았다.
교착 상태가 길어졌지만 류이진은 끄떡 않고 교란책을 폈다. 탈주자들에게 편지를 쓰게 해 화살에 묶어 항구로 쏘게 했다. 새들의 발에 묶어서도 보냈다. 그 결과 처음으로 폭동이 벌어졌다. 진압 과정에서 학살당한 수백 명의 시민들은 성 밖으로 내던져졌다.


소식을 들은 파비트라는 시민들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라고 명했다. 그 행동은 오스테라 성벽 안쪽에도 알려졌다. 민심이 술렁이며 발니오와 파비트라를 비교하게 되자 발니오는 발끈해 그런 말을 퍼뜨리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게 했다.
류이진은 파비트라의 전략이 주효했다고 칭찬했지만, 파비트라는 즐거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파비트라의 안색이 나쁘다고 느낀 류이진이 심중을 묻자 파비트라가 말했다.



“짐은 저들을 보호하고자 황제가 되었는데 보호하기는커녕 아까운 목숨을 빼앗고 있구나. 개인적 복수심 때문에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스테라에는 죄가 있지만 시민들에게는 없거늘.”



류이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전쟁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오스테라는 이스밀 공이 돌아가시기도 전부터 반역을 꾀해 왔으며, 끝없이 음모를 꾸며 제국을 어지럽혔습니다. 저들의 계략에 휘말려 죽어간 병사와 백성이 그간 얼마입니까? 페레 정벌과 남방 정벌에서 치른 희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께선 개인적인 복수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빨리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저들을 완전히 굴복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설픈 관용은 이후 새로운 전쟁을 부를 뿐입니다. 이 반역자들을, 이 전쟁을 황태자 전하께 물려주실 작정입니까?”



파비트라는 삶 자체가 곧 전쟁이었던 여제였다. 전쟁을 하자면 백성들의 희생을 피할 수 없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서인지 파비트라의 기분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파비트라가 과거에 해 온 전쟁이 약자 입장에서 치른 도전이었다면 이번에는 파비트라가 절대적 강자였다. 이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하나의 도시에 불과한 오스테라가 제국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비트라는 저들을 굴복시키고자 여기까지 왔다. 류이진의 말이 맞긴 하지만 힘으로 짓밟는 것보다 더 나은 해결책은 없었을까?


전쟁이 길어져서일까, 부쩍 혼란스러운 꿈이 잦아졌다.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에 맨발로 물고기를 잡던 오스테라의 찬란한 해변이 나타나고, 그대로 이스밀과 백년해로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카타니아의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국의 백성들에게도 그 편이 더 낫지는 않았을까?


교착 상태가 넉 달째에 접어들자 오스테라도, 파비트라 군도 끝이 보이지 않는 대치 상태에 지쳐갔다. 물자 소비를 극도로 줄이느라 양군 병사들의 불만도 심각한 지경이었다.
그때 칩거 생활 중이던 발니오에게 아르카디오가 찾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전까지는 발견하기만 하면 목을 매달겠다고 떠들고 있었건만 발니오는 반색했다. 맨발로 뛰어나가 맞이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아르카디오는 어디를 헤매다 왔는지 행색이 초췌했다. 그가 한 첫 마디는 자신을 여제의 진영에 사신으로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정말인가? 전쟁을 끝낼 비책이라도 있나?”



아르카디오는 고개를 저었다. 협상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니 조건을 줄 필요도 없다고 했다. 다만 데리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칩거하는 동안 발니오는 아르카디오가 말해준 계략들을 하나하나 복기해보고 있았다. 그러다가 처음 만났을 때 아르카디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아르카디오는 항복하자고 말했다. 승산이 없다면서.
돌이켜 보면 아르카디오야말로 패전론의 주창자였다. 오늘 코앞에 닥친 여제의 대군은 과거 아르카디오가 경고한 대로 섣불리 시도한 계략이 불러온 대가였다.


처음부터 패전론자였던 아르카디오는 이제 잘 패전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비록 엄청난 길을 돌아왔지만 발니오도 아르카디오의 뜻을 이해했다. 아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튿날, 오스테라 사신이 대화를 요청한다는 보고가 파비트라 진영에 날아들었다. 파비트라는 일단 그들을 막사로 들이게 했다. 그러나 아르카디오가 대동한 노부인을 보자 깜짝 놀랐다. 노부인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눈도 보이지 않았지만 파비트라의 목소리를 듣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폐하, 너무 긴 세월이 흘렀군요.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노부인은 열세 살의 파비트라가 연고자 한 명 없는 오스테라로 왔을 때 어머니처럼 보살펴 주었던 사람이었다. 파비트라는 그녀를 무척 따른 나머지 결혼식 때 오지 못하는 친어머니 대신 어머니 노릇을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녀도 순진하고 쾌활한 황녀를 딸처럼 사랑했다.
그러나 몇 년 뒤, 카타니아가 찾아와 오스테라를 떠난 후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가끔 떠올리기는 했지만, 그날 이후 오스테라는 줄곧 파비트라의 적국이었던 터라 생사를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실은 워낙 나이가 많아 이미 죽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 아리땁던 폐하의 용안을 제가 이제 보지 못합니다.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드리던 때가 엊그제 같거늘…….”



파비트라도 눈물이 울컥 솟았지만 꾹 참아냈다. 그리고 기억하노라고 짧게 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이 사람의 존재에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을 드러내어선 안 되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노부인을 위해서도.
노부인은 옛 일을 말하다가 곧 오스테라의 시민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를 털어놓으며 여제께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예상된 수순이었다.
파비트라가 대답하지 않자 아르카디오가 말했다.



“폐하, 오스테라가 원했던 것은 반역이 아니라 독립이었습니다. 그것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저희가 독립을 바라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차별과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아라야니 1세 폐하께서 매긴 중과세는 무역항 오스테라의 존립을 위협할 지경이었지만, 한 번도 경감된 적이 없었습니다. 세금을 피하려는 밀무역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지만, 그 또한 살고자 하는 백성의 몸부림이기도 했습니다. 저희는 수없이 세금을 내려달라고 호소했지만 변방 도시의 사정은 한 번도 황제 폐하의 귀까지 전해지지 않는 듯했습니다. 오해에 지치고 황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혼란에 눈이 먼 저희는 혹 오스테라를 도와줄 황제께서 등극하실 수는 없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었고, 혼란기에 이곳저곳에 어리석은 줄을 대며 갈팡질팡했습니다. 이제 제국의 진정한 주인이 되신 폐하께서 저희의 우둔함을 벌하고자 친히 이곳까지 오신 것을 압니다. 그러나 모든 하리하란이 첫 발을 내디뎠던 이 땅을 예전처럼 바위더미로 되돌리셔야 하겠습니까? 오스테라에서 일어났던 빛이 마침내 이 위대한 대륙을 일구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제발 그 빛을 끄지 말아주십시오.”



뒤에서 듣고 있던 류이진은 내심 감탄했다. 대체 이자는 누구인가? 칼리아이라면 오스테라의 군소 가문 중 하나로만 알고 있었고, 그간 업적이 부각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명백한 잘못은 애매하게 눙치고 자기들을 피해자로 만들어 동정심을 유발하는 화술이 범상치 않았다.

 

 

25화

 

반면 나디르는 벌컥 화를 내며 여제에게 저들의 간사한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고했다. 오스테라는 오늘이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약자였던 적이 없었다. 늘 저들이 대륙의 주인인 양 거만했다.
나디르는 오스테라와 수백 년간 경쟁 관계였던 탑의 도시 출신이었고, 오스테라가 탑의 도시의 왕자나 다름없던 이스밀을 살해하고 탑의 도시마저 한때 차지했던 것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그 복수를 완성할 차례였다.
잠시 후, 파비트라가 대답했다.



“짐 역시 오스테라의 백성들을 걱정하고 있다. 발니오를 비롯한 죄인들이 스스로 성문을 열기를 바랄 뿐이다.”



아르카디오가 어떤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든, 말 몇 마디로 전쟁이 끝날 리는 없었다. 아르카디오도 알고 있었다. 파비트라는 노부인에게 투항을 권했지만 노부인은 가족들이 성 안에 남아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르카디오와 노부인은 오스테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류이진은 이 묘한 해프닝을 흘려 넘기지 않고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았다. 저 정도의 재주를 가진 자가 이곳까지 아무 목적 없이 왔을 리 없었다. 그러나 저들은 패전 조건 하나 가져오지 않았다. 기껏 한 것이라고는 막무가내로 용서를 빌다가 거절당하고 돌아간 것뿐이었다.
파비트라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노부인을 데려오긴 했지만, 이만한 시간과 물자를 들인 전쟁에서 그런 일로 뜻을 뒤집을 정도로 연약한 여제가 아니었다. 저자들인들 그걸 모를까?
이걸로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왔다면, 저자는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수 일 뒤, 마침내 목재가 도착했다. 공성차가 하나하나 세워지기 시작했다. 오스테라 인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성차가 완성되자 파비트라는 신들에게 제례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이튿날, 총공격을 명령했다.
날이 밝자마자 시작된 공성전은 저물녘까지 한시도 멈추지 않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훗날 ‘오스테라 혈전’이라고 불리게 된 이 전투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자의 수는 양군 공히 5만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전황을 살펴보고 공세를 멈출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공성차에 올랐던 파비트라의 어깨에 화살 한 대가 스치듯 꽂혔다.


이 일로 그날의 전투는 끝이 났다. 파비트라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본 사람이 워낙 많아 부상이 위중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을 들은 오스테라 인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여제가 쇠약해진다면 이대로 전쟁이 끝나지는 않을까? 반대로 복수심을 부추겨 일말의 자비도 얻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전쟁은 며칠 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파비트라의 상처는 회복되어 갔지만 그와 함께 지독한 두통이 생겨났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던 이 두통 때문에 낮에도 누워서 지내다시피 했고, 밤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그렇게 시달리다가 어느 새벽녘, 파비트라는 불쑥 혼자 깨어나 앉아 기묘한 광경을 보았다.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풍경 속에 서 있는 자신이 보였다. 틀림없이 자신이었다. 젊은 듯도 늙은 듯도 했다. 여러 사람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누구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자신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남은 사람들이 모두 몸을 돌려 각각 다른 방향으로 가 버렸다.


꿈이었을지도, 환각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와 함께 떠오른 생각이 머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파비트라는 그대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날이 밝자마자 류이진을 불렀다. 그리고 편지를 내밀었다. 류이진이 무엇이냐고 묻자, 파비트라는 유서, 라고 짧게 말했다.
물론 이런 편지가 황제의 정식 유서가 될 순 없었다. 아마도 자신이 죽고 나면 읽어 달라는 뜻이리라. 류이진은 편지를 받들어 품에 넣고는 말했다.



“유서란 언제 써 두어도 무방한 물건입니다만, 아직껏 두통으로 죽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파비트라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말했다.



“생각해봐. 제국은 참 넓지. 여기서 황도까지는 얼마나 먼가? 남방은 또 얼마나 까마득하며 페레들의 고원은 또 얼마나 높던가? 경은 현명하니 묻고 싶어. 이 넓은 제국을 한 사람이 보살피는 것은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 한들, 과연 가장 좋은 방법일까?”



류이진은 이상한 기색을 깨닫고 ‘혹시 오스테라와의 전쟁을 끝내고 싶으신 것인가’라고 물었다. 파비트라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 전투로 함락은 코앞이었다. 물러설 싸움이 아니었다.



“짐이 승리하여 제국을 통일한들 그것이 영원할까? 고작 몇 세대나 그 모습 그대로일까? 이곳저곳으로 날아가려는 새들의 다리를 억지로 한 자리에 묶어 놓은 것이 제국은 아닐까? 경은 비파 항구를 오래 다스렸지. 경은 죽고 나면 비파 항구에 묻히고 싶나, 아니면 고향 베로에에 묻히고 싶나?”



류이진은 지체 없이 ‘베로에에 묻히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자 파비트라는 류이진을 동방의 군주로 봉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비파 항구를 떠나 베로에로 돌아가도 좋다고 명했다. 류이진은 다소 놀랐으나 곧 감사의 예를 표했다.
류이진은 오래 전, 이스밀과 함께 비파 항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떠나온 후로 한 번도 베로에에 돌아가지 못했다. 수십 년간 타향에 매여 의무를 다해 온 그를 드디어 놓아준 셈이었다.



“그만한 세월과, 정성과, 충성스러운 백성들도 경의 고향을 바꾸지는 못했구나. 짐은 죽으면 황도에 묻힐 테지. 그런데 만약 짐이 황제가 되지 않고 일개 황녀로 살아가다가 죽을 때가 되었다면, 내게 가장 행복한 기억을 준 곳에 묻히고 싶구나. 짐이 지금 부수고 있는, 곧 시체와 곡소리만이 남게 될 저곳에.”



류이진은 굳이 답변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여제가 몸이 불편하니 마음도 약해져서 감상적인 소리를 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류이진이 보기에 이 전쟁은 물러서서도 안 되고 물러설 필요도 없는 전쟁이었다.
빠른 승리만이 여제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리라. 수많은 전쟁에 지친 여제가 마지막 전쟁을 앞두고 감상적이 되었다 해서 실망할 것까지는 없었다. 여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 거의 이긴 거나 다름없는 전쟁이었다.


본래 영리한 기회주의자였던 류이진은 파비트라를 만나 한 황제를 진심으로 섬기는 빼어난 신하로 거듭났다. 그러나 주군을 위해 희생하는 법을 배웠다 한들 타고난 본질까지 바뀌지는 않았다. 류이진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사랑하기보다 지략으로 다루는 자였다. 자기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이 다 죽은 뒤, 먼 미래의 세상까지 걱정하는 성정은 아니었다.
그런 자였기에 류이진은 파비트라가 그날 깨달은 진실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튿날, 파비트라는 후위에서 머무르고 두 장군의 지휘로 공성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결국 끝이 났다. 오스테라는 함락되었다.
여제의 군대는 노도처럼 오스테라 시내로 밀려들어갔다. 곧 약탈이 시작될 찰나, 나디르가 거느린 연의군이 그들을 막았다. 그러더니 오스테라를 완전히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불만을 품은 병사들과 연의군 사이에서 작은 충돌이 벌어졌다. 비파 항구에서 온 군대의 지휘관들은 류이진에게 호소했다.


류이진은 본래 약탈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약탈이란 긴 전쟁에 지친 병사들의 보상심리를 채워줄 뿐, 실제로는 복구에 더 큰 비용이 들기 마련이었다. 아예 파괴할 생각이 아니라면 흉흉해진 민심을 되돌리기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스테라 정도로 가치 있는 항구를 아예 잿더미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류이진은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왜 나디르가 나서서 약탈을 막았을까? 류이진이 머리로 병사들을 다스린다면 나디르는 병사들의 원초적인 욕구를 이끌어내고 충족시켜주는 부류의 지휘관이었다. 그런 그가 약탈을 막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불안정한 기류가 흐르는 오스테라로 여제가 행차했다. 파비트라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가마에 올라 시내로 들어섰다. 거리를 지나가는 동안 시민들의 퀭한 얼굴과 멍한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의 집들은 되는대로 뜯어내어 방벽을 쌓느라 거의 다 파괴되어 있었다. 옛 번영은 그늘 속으로 숨어버렸다. 기나긴 농성이 이 도시의 피와 살을 모조리 뜯어먹은 듯했다.


며칠 뒤, 류이진은 새 총독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덜 마무리된 행정을 처리하기 위해 군대를 돌려 비파 항구로 돌아갔다. 비파 항구의 새 총독은 메레디스의 아들이자 오랫동안 류이진을 보좌했던 헤로달이 맡게 될 예정이었다. 헤로달은 몇 년 전, 류이진의 막내딸 제니리와 결혼해 류이진의 사위가 되었다.


파비트라가 요양하는 사이, 오스테라의 전후 처분은 나디르가 맡았다. 나디르는 시내의 약탈을 막았던 것과는 달리 오스테라의 지배 귀족을 모조리 없애버리려 들었다. 함락된 오스테라를 지배했던 가문들은 모두 붙잡혀 왔다. 원로원 의원들은 목이 매달리고 가족들은 노예가 되었다.
발니오는 도망쳐 거리에 숨어 있다가 수 일 만에 붙잡혀 왔다. 이미 넋을 놓은 듯한 그자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내내 아르카디오라는 자를 끊임없이 욕했다. 그가 자기를 구해주기로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르카디오는 워낙 흔한 이름이어서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발니오의 목은 성벽 높이 매달렸다.


며칠 뒤, 몸이 나아진 파비트라는 오래 전에 이스밀과 함께 살던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옛 집은 이미 사라졌지만 바닷가는 그대로 있었다. 파비트라는 수행원들을 잠시 기다리게 하고는 신발을 벗고 바다로 들어갔다.
마침 해질녘이었다. 발치를 스치는 바닷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따뜻했다. 파비트라는 맨발을 좋아했다. 맨발로 있을 때면 늘 이스밀이 떠올랐다. 발을 적시며 걷자니 이 모래밭을 웃으며 달리던 소녀와 그 뒤를 따라오던 젊은이가 어렴풋이 눈을 스쳤다.


파비트라가 차츰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자 수행원들이 걱정하며 뒤를 따랐다. 그때 바다 너머에서 들어온 쪽배 한 척에서 어부가 내리더니 여제에게 예를 표했다. 처음에는 누구인가 싶었지만, 문득 얼마 전 만났던 노부인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기억이 났다. 그는 전장을 찾아왔던 노부인의 아들이었다. 옛날 함께 어울려 놀던 기억이 나 파비트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에게 작살 쓰는 법을 배웠지. 이 바닷가가 그대로인 것처럼 반갑구나.”



어부는 여제의 축복을 받으려는 것처럼 발치로 와 무릎을 꿇었다. 파비트라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 어부가 숨기고 있던 단도가 파비트라의 배를 꿰뚫었다.